그 날부터 소녀는 팔 걷고 나서서 이 집안을 다스렸다. 이 날을 상속한 자는 민승호며, 따라서 민승호의 아내야말로 이 집안의 주부이거늘, 소녀는 이 집안을 자기의 집으로 여기고 몸소 모든 것을 지휘하고 다스렸다. 이 소녀의 너무도 영리하고 민첩함은 간혹 그 도를 넘어서, 다른 사람의 감정을 해하는 일까지 흔히 있었다. 그리고 그런 것을 또한 모르는 바도 아니지만 소녀는 스스로 이 집안을 다스렸다.

 

“작은아주머니!”

 

이 소녀가 너무도 간섭이 심하기 때문에, 집안 계집하인들은 소녀에게 이런 별명을 바쳤다. 그리고 뒤에서 손가락질하고 있었다.

 

그것은 기괴한 환경이었다. 소녀는 이 집안에서의 자기의 입장을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이 집안은 무론 자기의 친아버지의 집안이로되, 지금은 딴 집에서 들어온 민승호의 아내(올케)가 이 집의 주인이라는 것을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그것을 잘 알기 때문에 소녀에게는 자기의 입장이 불쾌하였다. 불쾌하기 때문에 소녀는 자기가 가지지 못한 권리를 감행하여, 스스로 자기의 마음을 위로하는 것이었다.

 

소녀가 즐겨서 읽는 책은 '좌씨전(左氏傳)'이었다. 온갖 현부전(賢婦傳)이며 수신서를 피하고 소녀는 어렸을 적부터 권모술수(權謀術數)를 연구하였다. 여자로서는―더구나 소녀로서는 당치 않은 '좌씨전'을 읽노라고, 자기가 참견할 가사에도 참견을 못하는 때까지 있었다.

 

이 때의 이 소녀의 환경과 입장과 읽는 책과 경험한 경력이, 후일 대원군의 간택을 받아서 왕비로 책립된 뒤에 그가 사용한, 그 놀랄 만한 권모술수적 정치―정치라기보다 오히려 술책―을 낳은 것이었다.

 

'작은아주머니―'

 

세상이 모르는 삼청동 한편 구석에서는 한 개의 작은 아주머니가 차차 장성하며, 그의 놀라운 지혜와 술모(術謀)를 기르고 있었다. 그의 양오빠 민승호는 소녀에게는 좋은 친구요, 동지요, 고문이었다.

 

가을도 가고 겨울도 갔다.

 

신유년이라 하는 해는 고요히 과거장으로 감기어 들어갔다. 표면 역시 아무 변화가 없이 지난 해였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적지 않은 변동이 있었다.

 

이하전이가 역모로 몰려서 죽었다.

 

왕자가 탄생되지 못하고 상감 승하하는 날에는, 이하전이가 제 이십 오대의 임금이 될 것으로 내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하전이가 죽은 뒤에는 당연히 거기 얽힌 문제가 생겨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조 대비와 흥선군 사이에는 밀약이 성립되었다. 이러는 가운데서도 상감의 건강은 나날이 좋지 못하여 갔다. 뇌빈혈을 일으키는 돗수가 더욱 잦았다. 용안이 종잇장과 같이 창백하게 되고 늘 수족이 떨리었다.

 

수라를 진어하는 양도 나날이 줄었다.

 

뿐만 아니라, 갑자기 아무 까닭도 없이 눈물을 소나기같이 흘리며 혼자서 체읍하는 일도 차차 많아졌다.

 

원자(元子)를 아직 못 보고 건강이 나날이 쇠해 가기 때문에, 김씨 일문에서는 갈팡질팡하였다. 아직껏 그 세가 너무도 컸는지라, 사면에서 미움만 사고 있는 김문은, 용상의 밑에 숨어서 그 지위를 그냥 보전하는 있었거늘, 이제 여차하는 날에는 그 일족을 잔멸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표면 무사 태평히 지나는 듯이 보이면서도 이 커다란 문제 때문에 그 일족은 갈팡질팡하였다. 어떻게 이 국면을 타개하려고 모이면 수군수군 의논하였다.

 

그러나 묘책을 나지 않았다. 수군거리면 수군거리느니만큼 근심만 더욱 커 갈 뿐이었다.

 

이러한 동안에도 그들은 더욱 급속히 더욱 맹렬히 매관 매작이라, 토색이라, 학정이라 온갖 못된 일을 더 발전시켰다. 어떻게 되면 정권을 잃을지도 알 수가 없는지라, 자기네가 정권을 잡고 있는 동안에 단 한 푼이라도 더 긁어 들이기 위하여 자기네 일족 안에서도 서로 경쟁을 하여 가면서 갖은 악행을 하였다.

 

흥선은 또 흥선으로서, 김씨 일문의 눈을 속이기 위하여 밤낮을 가릴 것이 없이 허튼 생활을 계속하며, 남에게 손가락질받을 일을 따라다니며 하였다. 남의 침뱉을만한 일은 반드시 행하고야 마는 흥선이었다. 이 모든 일을 하여 놓고도 부끄러운 줄을 모르는 흥선이었다.

 

표면 특별한 대사건이 없이 지났다. 역사에 기록될 만한 일로는 겨우 이하전 역모 사건이라는 일이 하나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 이면에서는 흥선의 둘째도령의 운명이 작정된 해였다. 조선이라 하는 나라의 운명이 작정된 해였다. 김씨 일문의 잔멸의 원인이 생겨난 해였다.

 

아무런 악정(惡政) 아래서도 반항이라는 것을 할 줄을 모르는 이 어질고 착하고 기운 없는 백성과, 선정(善政)은 베풀고 싶지만 대신들의 낯이 어려워서 행하지 못하는 상감과, '선정'이라는 말과 '악정'이라는 말의 의의(意義)도 모르는 위정자(爲政者)들과, '의식(儀式)'이라는 것을 인생의 최대 중요사로 여기고 있는 선비들―이런 사람들의 모임인 조선이라는 나라에 신유년(辛酉年)이 고요히 타고 넘어갔다. 비가 오려는지 바람이 불려는지 예측할 수 없는 임술년(壬戌年)이 이르렀다.

 

임술년에 들어서면서부터 이 고요한 삼천리의 강토에 조금씩 풍파의 그림자가 보이기 시작하였다. '반항'이라는 것을 모르는 이 백성에서 조금씩 반항의 움이 돋기 시작하였다.

 

<운현궁의 봄 5부로 이어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