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선의 이런 난행을 당시의 명문 거족들은 모두 흥미있게 보고 비웃고 있을 동안 흥선의 난행의 위에 경계의 눈을 붓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훈련대장 영어 김병국이었다.
영어는 일찍 소년 시대부터 흥선을 알았다.
열 다섯 살에 흥선부정(興宣副正), 스물 두 살에 흥선정(興宣正), 스물 네 살에 흥선군―이렇게 봉군(封君)이 되어 스물 일곱 살에는 정일품 현록대부로 되고, 종친부 유사당상(宗親府有司堂上)이며, 오위도총부 도총관(五衛都摠府都摠官) 등을 역임할 동안의 흥선은, 결코 오늘과 같은 술주정군의 흥선이 아니었다.
작다란 몸집의 어디서 그런 큰 소리가 나는지, 흥선이 한 번 호령을 할 때는 부하 관리들은 모두 몸서리치고 하였다. 일 처리에 밝고 염치에 밝고 사리에 밝던 흥선이었다. 종친부며 도총부가 설치된 이래, 흥선이 재임했을 때만큼 일이 민첩히 신속히 명쾌히 처리된 적이 없었다. 위(威)와 은(恩)을 갖추어 상관으로서 부하 관리들에게 위포와 애경을 받고 있던 것이었다.
부산 장죽 길게 물고 호활한 음성으로 담소를 하던 당년의 흥선을 회상하건대, 그 사람이 후년 거리의 부랑자로 영락되리라고는 짐작도 못 할 일이었다.
당시의 많은 명문 공자들이 모두 그 몸차림이며 언어, 행동, 동작을 흥선을 본뜨려고 얼마나 거울을 들여다보며 애썼던가? 초헌에 높이 올라서 구종 별배를 전후 좌우로 거느리고 커다란 상투를 춤을 추이면서 길을 지나갈 때에는, 행객들도 모두 발을 멈추고 이 고귀한 공자에게 멀리서 경의를 표하지 않았던가?
그 흥선이 관직을 내버리고 은퇴할 때에, 세상은 처음은 다만 기이하게 여기었다. 그리고 은퇴한 이상에는 구름이나 희롱하고 학이나 벗하는 한 한가로운 귀인이 되려니 이렇게 알았다. 속세의 관직을 달갑게 생각각지 않아서 은퇴하는 것이어니 이렇게 알았다. 그리고 또한 그렇게 믿을 수밖에는 없을이만큼 당년의 흥선은 뛰어난 인물이었다.
그렇거늘 그 흥선이 관직을 물러나서 은퇴한 뒤에는 어떻게 되었다. 한 번 떨어지면서 속세에 나왔다. 두 번 떨어지면서 속인과 사귀었다. 세 번 떨어지면서는 무뢰한이 되었다. 일찍이 종실 공자의 여기(餘技)로서 배운 난초는, 후년의 타락된 흥선이 기생집 바람벽에 휘호하는 그림이 되었다. 날이 가고 달이 가고 해가 가는 동안, 이 관계에서 은퇴한 공자는 차차 속세에 발전하였다.
왕가의 친척이기 때문에 정계(政界)에 진출할 수 없는 흥선의 집안은 재산이 없었다. 재산이 없는 흥선이 직업도 없이 속세에 나다니노라니, 집안은 차차 꼴이 될 리가 없었다. 조상 전래의 보물도 하나 둘 차차 없어졌다. 마지막에는 이전에 타던 수레며 몸을 장식하던 관자며 갓끈이며, 집안에 남아 돌아가는 상이며, 항아리 나부랑이까지도 차차 팔아 없이하게 되었다.
일찍이 종실의 공자로서 행세하던 시대에 한성의 많은 명문 공자들과 사귀어 두었던지라, 어느덧 흥선은 당년의 친구들을 찾아다니며 구걸까지 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친구들도 그 구걸을 들어 주었다. 그러나 그것도 한두 번이지 도가 넘치게 되매 차차 눈살을 찌푸렸다.
구걸을 완곡히 거절하던 한때가 있었다. 그때가 지나서는 구걸을 노골적으로 물리치는 시대까지 이르렀다. 구걸을 거절을 받으면 누구나 창피한 일이다. 그러나 흥선은 그 창피도 몰랐다. 창피를 모르는 것을 세상은 다만 이것이 흥선의 인격이거니 하였다. 왕년의 흥선과 대조하여 보려 하지 않았다. 왕년의 흥선은 벌써 잊은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