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색 무문 갑사 창의(氅衣, 벼슬아치가 평소에 입는 웃옷. 소매가 넓고 뒤 솔기가 갈라져 있다) 정자관(程子冠. 예전에, 선비들이 평상시에 머리에 쓰던, 말총으로 만든 모자. 위는 터지고 산 모양으로 된 층이 두 층 또는 세 층으로 되어 있다)―
이런 편의(便衣)로서 김병기는 자기 침방에서 안석에 기대어 앉아 있다. 그 창 밖 툇마루에 세간 청지기가 치부책을 들고 꿇어 앉아 있다. 금은으로 장식한 부산 연죽(煙竹)에서 피오 오르는 향그러운 삼등초(三登草)의 연기에 상쾌한 듯이 한 번 기다랗게 숨을 내어 쉬고 병기는 말하였다.
“××부사에게서는?”
청지기는 치부책을 뒤적이었다.
“정월 열 나흗날 삼천 냥, 삼월 스무 이튿날 천 냥이올씨다.”
“○○현령에게서는?”
청지기는 벌걱벌걱 책장을 뒤졌다.
“정월 여드렛날 이천 냥이올씨다.”
“△△군수에게서는?”
“이월 열 사흗날 천 냥뿐이올씨다.”
약채전(藥債錢―각 고을 수령에게서 권문에 보내는 공물)을 조사하라는 것이었다. 단 천 냥이라는 데 병기는 한순간 눈살을 찌푸렸다.
“□□군수에게서는?”
청지기는 책장을 이편으로 뒤적이고 저편으로 뒤적이고 한참을 뒤졌다. 한참을 뒤적일 동안 병기는 참을성 좋게 말 없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직은 온 게 없는가 봅니다.”
병기는 숨을 내어 쉬며 눈을 천천히 한 번 감았다가 떴다. 병기 자기의 손을 통하여 각 곳에 나간 수령들을 차례로 꼽는 것이었다.
“○○군수에게서는?”
“산삼 열 근과―그…”
청지기는 말을 주저하였다. 병기는 재쳐 물었다.
“그…?”
“그…”
“응!”
생각났다. 산삼 열 근과 몸 심부름이라도 시키시라는 명목으로 아리따운 처녀 한 명을 구해 보낸 것이었다.
“산삼 열 근과 돈 삼만 냥이지, ○○군수에게서는?”
“…”
“?”
“이만 냥을 추송한다 하옵니다.”
병기는 눈을 번쩍 떴다.
“외상이냐?”
“…”
“썩 물러가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