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인은 허리를 굽힌 채 이마 너머로 주인을 힐끗 보았다. 한 번 입 밖에 꺼낸 말은 절대로 번복하는 일이 없는 병기인지라, 힐끗 본 뒤에는 공손히 허리를 굽혔다. 그리고 물러갔다.
이 명령이 시행되느라고 뜰에서는 두선거리는 소리를 병기는 역한 듯이 눈살을 잔뜩 찌푸리고 듣고 있었다.
김천 최 장의가 병기를 만나게 된 것은 저녁때가 거의 되어서였다. 돈냥이나 있는 듯한 최 장의는 병기의 아들을 위하여 연줄 값으로 이백 냥을 내고, 청지기에게 또한 심부름 값으로 쉰 냥을 내고, 그 쉰 냥의 덕으로 여러 번 대감을 재촉하였지만 대감은 좀체 만나 주지 않았다.
남산동 모를 내쫓은 뒤에는 내실로 들어가서 한 시각이나 있다가, 다시 정침으로 나와서도 좀체 최 장의를 만나 주지 않았다. 점심을 먹는다, 점심 뒤에는 잠시 낮잠을 잔다, 낮잠에서 깨서는 어제 읽던 소설의 계속을 한참 읽는다 하여 저녁때가 되어서야 최 장의를 불러들인 것이었다.
최 장의는 나이는 거의 병기와 연갑이었다. 영외에서 인사를 드리는 최를 병기는 거만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자네가 김천 사는 최 장의인가?”
“네, 그렇습니다.”
“거기 앉게.”
병기는 담뱃대로 최의 앉을 자리를 지적하였다.
“선향이 어딘가?”
“△△올씨다.”
“김천읍내 사는가?”
“네!”
“성주는 누구더라?”
최 장의는 성주의 이름을 말하였다.
“응, 정사는 어떤고?”
“선정이올씨다.”
“그래서 나를 찾은 연고는 무엇인고?”
“네, 다름이 아니오라, 소인은 남성사의 장의(掌議)이옵는데, 이번 남성묘에 충문공(忠文公―金祖淳) 어른의 위패를 모시고 선액(宣額)을 받잡고자 대감께 그 소장을― 좀…”
병기는 눈을 천천히 굴려서 선비를 바라보았다. 그 소장은 하려면 예조를 통하여 대궐로 들어가야 할 것이다. 그것을 자기에게로 떠들고 온 그 까닭을 얼굴의 표정으로 써 보고자 함이었다. 충문공 김조순은 병기의 양할아버지다. 이러한 연줄로 자기에게 부탁함인가?
다른 데로 가져가면 당연히 거대한 황금을 바치고야 성공할 일을, 사손(嗣孫)에게 부탁하여 공짜로 하여 보려는 심정으로 자기에게 가지고 온 것인가? 혹은 자기는 이 나라의 세도인지라, 자기라야 그 일이 성공될 줄 알고 다른 곳을 젖혀 놓고 자기를 찾아 온 것인가?
김천에서 남성사라는 서원이 있다는 말을 병기는 일찍 들은 일이 없다. 그런즉 남성사라는 것은 그다지 유명하지 못한 서원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런 미약한 서원에 충문공(순조비 김씨의 아버지요, 지금 권문 김씨의 조상인)을 모시고, 충문공의 위패의 힘으로써 세력을 펴 보려는 계획인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공자를 모시기보다도, 명나라 어떤 천자를 모시기보다도, 권문 김씨의 조상을 모시는 편이 더욱 세 쓰기에 첩경인 것은 거듭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그 충문공의 위패를 모심에 있어서 다른 곳을 찾지 않고 그의 자손되는 병기 자신을 찾은 까닭을 병기는 알아보려고 최의 얼굴을 한참 들여다보았다. 한참 들여다보다가 병기는 퉁기어 버렸다.
“그러면 자네는 길을 잘못 들었네. 나는 어떻다고 대답할 수가 없네.”
병기는 담배 서랍에서 삼등 엽초(三登葉草)를 꺼내어 손으로 말면서 고요히 이렇게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