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가난한 노선비가 가난에 굴고 또 굴다가, 어떻게 사충사의 유일사를 얻어 하게 된 모양이었다. 하인이 받들고 있는 그 상자는 '조'를 넣은 상자인 모양이었다.

 

사충사(뿐만 아니라 조선 안 모든 서원)의 조─그것은 이 나라에 있어서는 옥새(玉璽)의 다음 가는 권위 있는 '도장'으로서, 각 지방의 방백의 관인(官印)보다 훨씬 세력이 높은 것이었다.

 

옥새며 지방관의 관인은 흔히 본 일이 있으되, 조를 처음 보는 성하는 그 공단보에 싸인 네모난 상자를 흥미 깊은 눈으로 굽어 보았다. 그 '조'의 놀라운 권위는 이미 익히 듣고 있었으므로―

 

노돌 나루를 건너서면, 장청류의 한수를 굽어 보는, 경개 좋은 바위 위에 한 사당이 서 있으니 그것이 사충사이다.

 

당쟁 때문에 참화를 본 김창집, 조태채, 이의명, 이건명의 네 유신(儒臣)의 위패를 모신 곳으로서, 그 때 함께 결련되었던 유신들의 후손 가운데서 일유사를 뽑는 것이었다. 이 학사도 그의 오대조가 그 때 그 사건에 원배를 갔던 덕으로, 어떻게 운동을 하여 일유사 자리를 구한 것이다.

 

“그러면 아저씨도 인젠 생활이 좀 펴셨겠습니다그려?”

 

“생활? 암 폈지. 석 달 내에 내 몫으로도 개똥밭이며 수원 논이며가 약간 생겼네그려. 이제 일년 안으로 당대 먹을 게야 생기겠지.”

 

“호오! 많이 벌으셨습니다. 그 때 그―심? 석?”

 

“석경원이란 놈 말인가?”

 

“네, 석 이방(石吏房)말씀이외다.”

 

“암, 그놈도 벌써 잡아다가 가두기를 네 번 했네그려. 내 재산 홀짝 빨아 먹었던 그 놈, 인젠 다시 나한테 홀짝 빼앗기구 거지가 돼서 어디로 떠나 갔다지.”

 

“시원하시겠습니다.”

 

“시원쿠 말구! 좌우간 우리 새 집에 가 보세.”

 

“그러십시다.”

 

성하는 이 쾌활한 늙은 선비의 인도로 선비의 집을 찾기로 하였다.

 

사충사에서 발행하는 서독(書牘)―일유사의 '조'가 찍힌 그 서독은 놀라운 권위를 가지고 있는 것이었다.

 

지방관의 관인(官印)이 찍힌 영장은 그 관할 구역 이내에서밖에는 통용이 못 된다. 영변 부사의 영장이 안주 땅에서 통용 못 되고, 전라감사의 영장이 경상도에서 통용 못 되고―각각 그 관원의 관할하는 구역 안에서밖에는 통용이 되지를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서원 유사의 도장이 찍힌 서독은, 남으로는 제주에서부터 북으로는 백두산까지 통용 안 되는 곳이 없다. 가령 용산 건너 노돌에 있는 사충사에서 '동래 땅에 사는 아무를 잡아 오라'는 서독이 날 것 같으면, 그것을 가진 하인은 동래 땅에 가서 그 지정한 인물을 잡아 올 권한이 있다. 그 곳의 지방관도 이를 금지하지를 못한다.

 

잡아 오는 데 무슨 명목이나 까닭이 없다. 그저 잡아올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