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감은 낭패한 듯이 마리(머리)를 두르며 두어 번 방안을 살다. 본시 빈한한 가운데서 자라고 왕자의 덕과 왕자의 품위를 배우지 못한 상감은, 종실의 웃어른이나 나이 많은 재상의 말에 대하여는 늘 낭패한 듯이 이런 태도를 취한다. 상감의 말씀이 있기 전에 대비가 겹쳐 나갔다.

 

“역모로 치죄하셨다는 승전빛(承傳色)의 말인데 허전은 아니겠지요?”

 

“네. 제가―신이 사약을―이 하준―하전이가―저…”

 

낭패하는 왕의 말은 뜻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대비는 이 알아 듣지 못할 말을 귀찮은 듯이 듣고 있다가 한 마디―

 

“참 잘 허시우!”

 

한 뒤에는 머리를 돌려 버리고 말았다.

 

왕은 끝 없이 낭패하였다. 마치 어른의 꾸중을 들은 어린애와 같이 족장(足掌)을 연하여 움직이며,

 

“소자가 신이―영의정이―역모―사약…그…”

 

알아 듣지 못할 말을 또 하였다.

 

그러나 상감의 구중에서는 '영의정'이라는 한 마디가 나왔다. 소위 역모 사건 제조에는 영의정 김좌근이 한몫 끼었을 것은 대비도 이미 짐작한 바 있지만, 상감의 구중에서 분명히 나온 이상에는, 이제는 의심할 여지가 없이 이 사건의 배후에는 김씨 일문이 있고, 또 그 배후에는 장래의 승통자(承統者)라 하는 거대한 문제가 있는 것이다.

 

대비는 경멸하는 듯한 눈자위로 용안을 보았다. 대비의 입술이 문득 떨렸다. 하마터면 불경한 말이 나올 뻔한 것을 대비는 겨우 삼켰다.

 

이 상감―대비의 뜻에 거슬려서 인손이를 눌러 버리고 강화도에서 모셔 온 상감께 대하여, 대비는 좋은 감정을 품지 못하였다. 더구나 너무나 어질기 때문에, 김씨 일문의 농락 아래서 행동하는 상감인지라, 야심과 용감과 권세에 대한 동경심이 만만한 대비에게는 답답하기까지 하였다.

 

“참 잘 하셨소!”

 

다시 한 번 뇌일 때는, 대비의 마음에는 이번의 일에 대한 분풀이를 반드시 하겠다는 단단한 결심까지 되었다. 김문이 김문의 세력을 이용하여 행동하는 이상에는, 대비는 넷서 한 대비로서의 권병으로서 행할 수 있는 대책을 강구할 밖에는 도리가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