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수 년 전에 헌종에게서 당연히 인손이에게로 갔어야 할 어보가, 지금은 뚱딴지 강화 도령에게로 가 있다. 그러나 필경은 인손이에게로 돌아올 운명을 가지고 있다. 김문 때문에 빼앗겼던 어보는, 지금 바야흐로 새 주인을 물색하고 있다. 새 주인을 지정할 권리를 잡은 조 대비는, 그 어보를 원 주인 인손이에게로 돌리려고 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김문들의 갈팡질팡하는 꼴을 보면서 조 대비는 속으로 늘 미소하고 있던 것이었다. 건강이 좋지 못하고 후사가 없는 '강화 도령'의 뒤에는, 인손이가 당연히 어보의 소유자가 될 것이며 행사자가 될 것으로 조 대비는 단단히 작정하고, 김문의 득세를 여름 날 꽃과 같이 바라보던 것이었다.

 

그 인손이가 홀연히 모라는 명목 아래 사약이 되었다. 어보의 장래 소유자를 지정할 권리가 있는 유일인인 조 대비에게 '장래의 어보의 소유자'로 내정이 되어 있던 인손이―자라서 이하전이가 의외에도 역모에 몰려서 죽음의 길을 떠나게 된 것이다.

 

분노라 할지 불쾌라 할지 분간하기 힘든 괴로운 감정 때문에, 조 대비의 얼굴은 잔득 찌푸린 채 펴지지 않았다.

 

아까 내관에게 향하여 상감께 뵙겠다고 말하였지만, 그것은 이하전이가 아직 죽지를 않은 줄 알고, 즉 아직 사약까지는 하지 않은 줄 알고, 대사를 저지르기 전에 '종실의 어른'이라는 당신의 권병으로서 그것을 삭여 버리려고 하였던 것이었다. 이미 하전이에게 사약을 하였음을 안 이상에는, 나가서 뵈옵는다 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었다.

 

처치할 수 없는 울분―김문의 방자함이 오늘날 여기서 이하전이를 죽였다. 그것이 어명에 의지한 처단인지라, 아무리 종실의 어른인 조 대비라 할지라도, 그 김문의 방자를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다만 거기 대한 끝 없는 울분만 연하여 마음 속에서 일어날 따름이었다.

 

이미 절기는 여름―창문을 열어젖힌 그리고는 밭을 통하여 손님(女官房의 下女)들이 무엇을 들고 왔다 갔다 하는 양이 보였다. 조 대비는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어렴풋이 그것을 내다보고 있었다. 문득 여관 하나이 승전빛(承傳色─임금의 말을 전하는 내시)을 인도하여 가지고 왔다.

 

“상감마마께옵서 듭실까 여쭈어 왔습니다.”

 

툇마루에 꿇어 엎드린 내시는 이렇게 아뢰었다.

 

대비는 눈을 돌려서 발을 통하여 끓어 엎드려 있는 내시를 바라보았다. 아무 말도 없었다. 잠시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었다.

 

드디어 대비가 입을 열었다.

 

“도정은 벌써 사약을 하였다지?”

 

“하왔사온 줄로 아뢰옵니다.”

 

“운명하였다더냐?”

 

“그런 줄로 들었사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