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왕대비 김씨가 김좌근과의 약속을 이행하기 위하여, 표면으로는 손자님 상감의 환후 문안이라는 명색으로 여관 몇 명을 데리고 이 중희당(重熙堂)에 온 것은 바야흐로 이 때였다. 그리고 그것은 여름날의 긴 해도 거의 인왕산으로 넘고 황혼이 가까운 때였다. 창경궁의 숲에서는 깃을 찾아 돌아오는 새 소리들이 어지러이 여기까지 들릴 때―

 

시어머님 김 대비가 들어오기 때문에 조 대비는 황급히 아드님의 머리를 괴었던 무릎을 뽑았다. 그리고 조금 물러 앉았다.

 

“상감 환후가 좀 어떠시오?”

 

상감은 대왕대비께 인사를 하기 위하여 몸을 움직이려 하였다. 그것을 김 대비는 손짓으로 제의하고 좀 가까이 내려왔다. 그리고 수척한 상감을 굽어 보았다.

 

김 대비의 얼굴에도 수심이 가득히 나타났다. 이젠 절망이었다. 가망이 없는 것이 분명하였다. 오늘―늦어야 내일일 것이다.

 

한참을 수척한 상감을 굽어 보다가 얼굴을 들 때는, 김 대비의 입에서도 기다란 한숨이 나왔다. 그 한숨과 함께 모시고 온 명부(命婦)를 돌아보았다.

 

“저 보(寶)를 들어라.”

 

이 김 대비의 명령에 여관은 나아가서 어보를 양손으로 받들었다. 아까 조 대비가 아드님의 간청으로 조금 멀리 밀어 놓았던―

 

“이리 모셔 오너라.”

 

이 강역의 존엄을 표현하는 어보는 김 대비의 손으로 들어갔다.

 

조 대비는 깜짝 놀랐다. 상감 만세하기 전에는 다른 사람이 손을 대지를 못하는 어보였다. 승하하면 새로운 승통자뿐이 또한 손을 댈 권리가 있는 어보였다. 아무리 대왕대비며 왕대비라도 상감 계실 동안은 감히 손을 대지 못할 것이었다. 조 대비는 시어머님께 공손히 물었다.

 

“어보를 어떻게 하시렵니까?”

 

통상시라면 대왕대비며 시어머님되는 김씨께 이런 대담한 질문은 할 염도 못 낼 일이었다. 비상시인 지금에 있어서도 좀 도가 넘친 질문이었다. 김 대비는 마땅하지 못한 듯이 잠시 며느님을 보다가 대답하였다.

 

“종사를 받들 분이 오시기까지 내가 맡아 두는 것이오.”

 

“그러면 인손이를 부르시옵니까?”

 

김 대비는 머리를 가로 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