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들 한다. 종실의 어른되는 당신이 이 곳에 있거늘, 한 번 품도 하여 보지 않고 종친의 한 사람인 이하전에게 죽음을 준 것이었다.

 

그로부터는 대비는 입을 꼭 봉한 채, 한 마디의 말도 하지 않았다. 최씨가 머리를 다 빗기도록―그리고 방안을 다시 다 정돈하도록 대비는 입을 꼭 봉하여 버렸다.

 

커다랗게 뜨고 앞만 바라보는 대비의 눈에는 노염이 서리어 있었다.

 

너무도 방자하고 외람된 일이었다. 인손이―인손이―이제는 벌써 저세상으로 갔을 인손이의 어렸을 때의 모양이 차례로 대비의 머리에 떠올랐다. 꼬리를 땋아 늘인 시절의 사랑스런 도령이던 인손이의 모양―그 인손이가 이하전이라는 튼튼한 청년이 되어서, 지금 무력한 종친들 틈에 일단의 이채를 발할 때에, 대비는 그에게 얼마의 촉망을 붙이었던가? 모든 종친들이 지금의 외척들에게 감히 손가락질도 못 하고 멀리서 엎디어 절할 때에, 인손뿐은 왕족의 위신을 그들에게 보여 주고 있지 않았나?

 

눈을 멀거니 뜨고 있는 대비는 머리로는 지금으로부터 십수 년 전의 일을 회상하여 보았다. 조 대비의 아드님되는 헌종이 아직 재위 때―그리고 대비의 시어머님이시오 헌종의 조모님되는 순조비 김씨의 재세 시대―

 

조 대비의 아드님 헌종이, 한아버님 순조의 뒤를 이어서 즉위한 것은 여덟 살 되던 해였다. 열 한 살 되는 해에 승지 김 조은의 따님을 왕비로 맞았다. 그 왕비는 헌종 열 일곱 살 되던 해에 마마에 걸리어 사랑하는 지아버님을 남기고 저세상으로 떠났다. 그 이듬해에 판서 홍 재룡(洪在龍)의 따님으로 두 번째의 비로 맞았다. 이리하여 왕비를 두 번 맞고 위에 있기를 십 오 년 간, 불행히도 왕자를 보지를 못하였다.

 

나라에는 왕이 없으면 안 되는 것과 꼭 마찬가지의 이치로, 동궁(東宮)이 없으면 안 된다. 사람의 일이란 짐작할 수 없는 것으로서, 여차하는 날에는 상서롭지 못한 어떤 일이 생겨날지 모르는 것이다. 그래서 대궐에서는 장래 불행한 날의 방비를 하기 위하여, 은근히 종친 가운데 똑똑한 도령을 물색을 하여, 헌종이 왕자 없이 불행하는 날의 방비를 삼기로 하였다. 그리고 거기 선택된 이가 덕흥 대원군의 사손 이하전이었다.

 

하전은 대궐로부터 인손(仁孫)이라는 이름까지 받았다. 인릉(仁陵―순조의 능)의 손자라는 뜻이었다. 그리고 만약 헌종이 왕자를 못 보고 불행하는 날에는, 헌종의 뒤를 이어 이 존귀한 사직을 물려받기로 내정이 되었다.

 

조 대비의 지아버님되는 익종은 동궁(東宮)으로 하세했기 때문에 위에 올라 보지를 못하였다. 익종의 아드님 되는 헌종은 한아버님 순조의 뒤를 이어서 위에 올랐다. 그런지라, 익종은 비록 헌종의 생친(生親)이라 하나 후사를 잃은 셈이었다. 다시 말하자면 조 대비는 당신 아드님 헌종을 시아버님 순조의 후사로 드렸는지라, 조 대비(익종)의 대는(아드님을 두고도) 절사(絶嗣)가 되게 되었다.

 

조 대비는 이 새로운 공자 인손으로 하여금 절사가 된 지아버님 익종의 대를 잇도록 하게 하려 하였다. 그런지라, 조 대비는 매우 인손을 사랑하여 늘 인손을 대궐로 불러 들여서 궁중의 예의며 행실을 가르치신 것이었다.

 

만약 그 동안에라도 헌종이 왕자를 보면 이어니와, 그렇지 못하고 왕자 없이 만세하는 날에는 인손이는 익종(헌종의 아버님, 조 대비의 지아버님)의 대를 이어서 즉위할 귀하고 귀한 몸이었다.

 

이러한 동안에 드디어 헌종의 불행하는 날이 이르렀다. 한아버님 순조의 뒤를 이어서 여덟 살에 등극을 하여 재위 십 오 년, 왕자를 못 보시고 기유년(己酉年) 오월에 창덕궁 중회당에서 병환이 중하게 되었다.

 

헌종의 어머님인 조 대비의 심통은 거듭 말할 필요도 없다. 그 지아버님 되는 익종을 스물 세 살 때에 잃은 이래로, 이 쓸쓸한 인생을 아드님의 장성과 건강뿐을 축수하면서 살아오던 조 대비는, 지금 그 외아드님의 중환에 세상 만사를 잊고 간호하였다. 성년인 아드님을 만날 무릎에 붙안고, 대비는 마치 그 옛날 어린 시절과 같이 등을 두드리며 간호하였다. 인생에서 낙원을 겨우 만나 본 스물 세 살에 지아버님을 잃고 여기서 또 외로운 여생의 유일의 촉망이던 아드님의 중환을 만난 조 대비는, 오뉴월 염천의 더위를 잊고 오로지 성심을 다하여 간호하였다.

 

그러나 천명은 조 대비의 성심으로 어찌할 수가 없었다. 유월달에 들어서면서부터는 환후는 다시 가망이 없도록 되었다. 누구의 눈으로 볼지라도 금명간 국상이 날 것은 분명하였다. 그러나 조 대비뿐은 아직도 그렇게 보기가 싫었다. 눈에 분명히 보이는 일이라도 그것을 부인하고, 되지 못할 일이라도 만들어 보려는―그것은 극진한 모성애였다. 애통의 날은 하루가 가고 이틀이 갔다.

 

만약 여기서 헌종이 승하하고 특별한 책동만 없었더면 그 뒤를 이어서 보위에 오를 이는 인손이 밖에는 없을 것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순탄히 진행되기에는 당시의 세태는 너무도 어지러웠다. 당시의 종실의 어른은 조 대비의 시어머님되는 순조비 김씨였다. 그 김 대비의 세력을 근거삼아 궁중 부중에는 벌써 김문 세력이 단단히 벋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