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종(成宗)의 비 한시(韓氏)는 불행히 성종이 즉위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하세하였다. 후궁으로 있던 윤씨(尹氏)의 몸에서 왕자가 탄생하였으므로, 성종은 윤씨를 왕비로 책봉하였다. 윤씨의 몸에서 난 왕자가 후일의 연산군(燕山君)이었다.
윤씨는 시기심이 많고 버릇이 없는 사람으로서, 왕도 더 볼 수가 없어서 드디어 윤씨를 폐하고 사사(賜死)를 하려고, 그 의논 때문에 신하들을 전정(殿廷)으로 불렀다.
그 때의 재상 허종(許琮)은 왕의 부름을 받고 입궐하던 도중에, 시간도 좀 이르고 하므로 자기의 누님 댁에 들렀다. 그리고 누님에게 지금 입궐하는 까닭을 말하였다. 그러매 누님은 허 종의 말을 다 듣고 생각한 뒤에 허 종에게 향하여 한 가지의 비유로서 말하였다.
―어떤 집의 하인이 주인의 명령으로 마님(주인의 마누라)을 죽였다. 하인은 주인의 영을 충실히 복종한 것이다. 그러나 시대가 바뀌어서 주인의 아들(주인의 아들이면 또한 마님의 아들이다)을 섬기게 될 때에도 그 하인은 새 주인에게 총애를 받을까?
이 누님의 현명한 비유에 허종은 깨닫는 바 있었다. 그래서 누님 집에서 나와서, 입궐 도중 돌다리를 건널 때에 부러 낙마(落馬)하여 부상을 하고, 그것을 핑계삼아 입궐하지 않았다. 따라서 윤씨 폐비의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다.
성종이 승하하고 연산군이 위에 오른 뒤에, 연산군은 어머님 윤씨의 원수를 갚기 위하여, 그 때 그 회의에 열석하였던 재신을 전부 살육할 때에, 허 종은 그 회의에 참석하지 않은 덕으로 화를 면하였다. 사직골에 있는 종침교(琮沈橋)가 즉 허 종이 부러 낙마한 다리다.
왕실의 후사에 관한 의논에는 누구든 용훼하기를 꺼리지 않을 수가 없는 일이다. 만약 용훼하여 자기의 의견이 성공되는 날이면 이어니와, 실패에 돌아가는 날에는 그의 몸에는 반드시 좋지 못한 일이 이를 것이었다.
허종의 사건은 한 기묘한 예에 지나지 못한다. 영사를 뒤적이자면 종친의 어떤 사람과 가까이 지낸 사람은 지극한 영화를 보든가 지극한 참화를 보든가, 극단에서 극단에의 운명을 반드시 보았다.
이하전이 역모로 몰려서 해를 본 뒤에도, 거기 대하여 비평을 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모두 침묵을 지켰다.
정당한 승계자가 없는 상감인지라, 장래를 예측할 수가 없으매, 누구나 거기 대한 비판을 할 수가 없었다. 섣불리 비판하였다가 후일 어떤 일을 겪을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종친 가운데서는 한 마디의 비평도 없었다. 신하들 가운데서도 한 마디의 비평도 없었다. 모두들 그 사건에 대하여는 눈을 감아 버리고 말았다. 이런 사건에 대하여 비평이라는 것은 금물이었다. 비평을 피하기 위하여 모두들 그런 사건이 있는 것을 알지도 못하는 듯이 분주히 그 날의 저녁을 준비하고, 내일 아침의 조반감을 준비하였다. 모른 체하는 이상의 상책은 없기 때문이었다. 이리하여 이하전의 역모 사건은 적지 않은 사람의 희생자를 내었음에도 불구하고, 한 마디의 비평도 듣지 못하고 무사 평온한 가운데 처결되었다.
그들의 근친들이 남몰래 통곡을 하고, 남몰래 억울하다고 가슴을 몇 번씩 두드릴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