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서 천자문을 좀 배우다가 가세가 가난하기 때문에 학문도 중지하고 아직껏 초동으로 지낸 총각은, 오늘의 일이 무슨 일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네? 저―나―소인은…”

 

무엇이라 대답은 했지만 아무도 알아 들을 사람이 없었다. 짐작하건대 총각 자신도 몰랐을 것이었다. 이 총각에게 오늘의 행운을 이해시키기는 매우 힘들었다. 더구나 붙들고 가르치지도 못하고 계상(啓上)하는 형식을 취하지 않을 수 없으므로 더욱 힘들었다. 그것을 겨우 노력하여 이해하게 하고, 이 총각에게 천담포(淺淡袍)를 입히고 복건(幅巾)을 씌워 가지고, 정원용이 그 곁에 배종을 하여 서울로 돌아왔다.

  

이리하여 신왕은 뭇 종친이며, 문무 백관의 출영으로 돈화문으로 하여 빈전(殯殿)에 돌아서 대행왕의 영해를 모셨다.

  

사흘 뒤에 인정전에서 즉위하였다. 즉 철종―대행왕의 칠촌숙이요 흥선의 육천동생이었다. 어린 왕께 대한 대비의 수렴청정(垂簾聽政)은 왕의 보령 십 오까지로 그만두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상감께 있어서는 그 예를 취할 수가 없었다. 즉위가 보령 십 구 때였다. 그 생장과 환경이 너무도 낮아서, 정사는커녕 우중의 의식에도 너무나 앎이 없었다. 그런지라, 보령 십 구 세의 상감께 대왕대비 김씨가 수렴청정을 하였다.

  

철종이 승지 김문근(承旨金汶根)의 따님, 김병학의 종매(從妹)를 왕비로 책한 것은 즉위한 지 이태가 넘어 지난 신해년 구월이었다. 대왕대비 김씨의 수렴청정이 중지된 것은 즉위한 지 사 년째(만 삼년나마)되는 임자년 섣달이고, 계축년 정월부터야 비로소 친정을 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기유년에 즉위하여서 신유년까지 만 십 이년간, 왕비를 맞은 지 만 십 년 간, 친정을 한 지 만 구 년 간 한낱 강화의 초동으로부터 팔도 삼백여 주의 통수자로 올랐지만, 그것은 철종에게 있어서는 결코 행복된 일이 아니었다. 보리밥과 굳은 채소에 젓은 총각의 위에는 국왕으로서 수라는 너무 기름져서 잘 소화가 되지를 않았다. 매일 산으로 벌로 새 베러 다니던 총각의(안일한) 궁중 생활은 너무도 평안하여 체력이 나날이 줄었다. 대신들이 가져다 바치는 책은 골치 쏘기 여간이 아니었다. 그러나 강화 총각으로서 갑자기 보위에 오른 상감은,

  

―이것은 왕자로서의 당연한 의무거니.

  

여기고 싫다고 하는 뜻을 나타내지도 못하였다. 소화는 잘 안되지만 보리밥보다 맛있는 음식, 안일한 생활, 아리따운 비, 빈, 상궁 나인―이러한 가운데서 철종의 거간을 나날이 쇠약하여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