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종이 승하한 것은 기유년(己酉年) 유월(십 이 년 전―흥선의 나이 한창 장년인 서른을 겨우 넘은 때)이었다. 한아버님 순조의 뒤를 이어 여덟 살 때에 보위에 오른 헌종은 십 오 년 간을 지존의 위에 있다가, 보수 이십 삼에 창덕궁 중희당(重熙堂)에서 승하하였다. 승하한 헌종께서는 왕제(王弟)도 왕자(王子)도 없었다. 뿐더러 헌종의 아버님 익종(翼宗)께도 동기가 없고, 또 그 아버님 순조도 외로운 몸이었다. 헌종의 증조한아버님 정종께야 몇 동기가 있었을 뿐, 그 다음 순조 때부터 삼 대째는 겨우 대(代)만 끊이지 않고 내려왔다. 그런지라, 헌종 재세시에도 가장 가까운 친척이라야 칠촌숙이나 팔촌형제지, 그보다 더 가까운 혈기는 없었다.
헌종이 아직도 이십 삼의 청년이기 때문에, 친척 중에서 따로이 동궁을 책립하지도 않고 왕자 탄생을 기다리던 중이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승하하였다. 그런지라, 이 삼천리의 강토는 지배자를 잃음과 동시에 새로운 지배자가 누가 될지도 예측할 수가 없게 되었다. 승하한 헌종의 칠촌숙이나 팔촌형제 가운데서 선왕이 영립이 될 것이었다. 흥선도 헌종의 칠촌숙이었다.
이 때에 헌종의 한아머님 대왕대비 김씨(숙종비)가 신하들을 궁으로 불러 들였다. 상감 없는 지금에 있어서, 김 대비는 종실의 어른이요, 따라서 이 나라의 어른이었다. 나라로 보자면 상감 대리요, 종실로 보자면 사당 받들 후계자를 지정할 권리를 잡은 이는 김 대비 밖에 없었다. 대왕대비의 부름에 영중추 조 인영(領中樞 趙寅永), 판중추(判中樞), 좌의정 김 도희(左議政 金道喜) 등이 희정당(熙政堂)에 들어왔다. 상감을 갑자기 잃고 그 후계자까지 못 가진 신하들은 목이 메어서 발(廉) 뒤에 있는 대왕대비께 호소하였다.
“신등이 무록(無祿)하와 이 봉척지통을 만났습니다. 나라에는 잠시도 용상을 비일 수 없사오니 하교 계오시기를 바라옵니다.”
비록 친히 당신의 소생은 아니지만, 가꾸고 기른 애정을 끊을 수가 없는 김 대비는 목이 메어서 잘 말을 이루지를 못하였다. 발 안에서 대비의 무슨 하교가 있었다. 그러나 그 음성이 너무 작고 어읍 상반(語泣相半)이기 때문에 신하들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세 대의 임금을 섬기고 이제 바야흐로 또 네 대째의 임금을 섬기게 된 노신 정원용이 무릎걸음으로 조금 나갔다.
“대비전마마! 막중막대한 일이옵니다. 봉사교청(奉辭敎請)뿐으로는 안 되겠사오니 언교(諺敎)를 내려 주시기를 바라옵니다.”
이윽고 발 뒤의 대왕대비에게서 언교가 나왔다. 미리 준비했던 모양이었다. 도승지 홍 종응(都承旨 洪鍾應)이 받아서 폈다.
“영묘(英廟)의 혈맥은 금상(今上)과 강화(江華)에 있는 원범(元範)뿐이라, 이에 종사를 부탁하도록 정하노라.”
그리고 '원범'이란 이름 곁에 ×지제삼자(×之第三子)라 주가 달렸는데, 맨 윗 자는 잘 알아볼 수가 없이 되었다. 대신들은 돌려 보았다. 돈인이 다시 물었다.
“대비전마마! 광(廣)자의 변이 무슨 변이오니까?”
“구슬옥 변에 넓을 광!”
―강화 이광(李珖)의 셋째아들 원범으로 이 종실의 후계자를 삼는다―하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