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입으로는 농담을 하는 흥선이었지만, 이 고마운 동정이 그의 마음에 찔리지 않을 까닭이 없었다. 왜 이러느냐고 농담으로 넘기려는 그의 눈에도 그득히 눈물이 괴었다. 남에게 몰래 흘려 본 눈물은 적지 않았지만, 남의 보는 앞에서는 철이 든 이래로 처음 내어 본 눈물이었다. 입으로는 농담, 눈에는 눈물―이런 가운데서 흥선은 손을 고요히 들어서 계월이의 등을 두어 번 두드렸다.
“계월아!”
“?”
“한 신이도 잠자코 더러운 데로 기어 나갔느니라.”
계월이는 머리를 들었다. 눈물 괸 눈으로 흥선을 쳐다보았다. 그 계월이의 눈을 받으면서 흥선은 오른손을 들어서 무릎을 한 번 툭 치며 그가 즐겨서 부르는 시조 한 마디를 읊기 시작하였다.
“이러한들 어이하리, 저러한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하여 백년까지 하리라.”
옛날 그의 조상 태종 대왕이 고려의 충신 정 몽주의 마음을 떠보기 위하여 부른 시조―그리고 또한 가슴이 울울하고 불평할 때마다 흥선이 자기를 위로하기 위하여 부르는 시조였다.
“야! 가야금이나 내어 오너라. 울울하다.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져도 할 수 없지. 되는 대로 내버려 두고, 우리는 한송정 소나무로 배나 무어 가지고 한강에 띄워 놓고 술이나 먹자. 계월이는 붓고 석파는 먹고―이렇게 한 백 년 살자꾸나. 하늘이 주시지 않는 복을 따려도 따질 것도 아니고, 따지지 않는 것을 따려는 것은 헛수고나 하는 것이고―자, 너도 한 잔 받아라. 그리고 가야금을 내어 오너라. 먹고 놀고 놀고 먹고. 한 백 년을 이렇게 지내면 그 이상 팔자가 어디 있느냐?”
흥선은 적적한 미소를 띄어 한숨을 내어 쉬면서 이렇게 술회하였다.
비 갠 봄 하늘에는 커다랗고 부연 달이 솟아올랐다. 문을 방싯이 열고 그 달을 우러러볼 때에 흥선의 눈물 괴었던 눈에는 또 다시 새로운 눈물이 나오려 하였다.
하늘을 나는 밤새의 기괴한 소리가 몇 마디 봄 하늘에 퍼져 나갔다.
“적적한 밤이로다.”
흥선은 혼잣말을 하였다. 사람의 마음을 괴롭게 하는 봄밤―
가야금을 가운데 놓고 흥선과 계월이는 우두커니 마주앉아 있었다. 흥선은 안석에 가댄 채로 팔을 기다랗게 뻗어서 둥둥 두어 번 가야금의 줄을 튀겨 보았다. 그러나 곡조도 의미도 없는 것이었다. 둥둥 두어 번 의미 없는 소리가 나므로 계월이는 힐끗 흥선을 보았다. 그러나 곧 도로 눈을 아래로 떨어뜨리고 말았다.
고요하고 정숙하고 쓸쓸한 시간이 흘렀다. 드디어 흥선이 먼저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