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아. 이 공자는 벌써 그 모욕을 잊었나? 계월이로서도 아직 이가 갈리고 치가 떨리거늘, 당자 흥선 대감은 벌써 잊었는가? 계월이가 너무도 억울하기 때문에, 눈물 머금은 눈을 쳐들고 흥선의 얼굴을 바라보매, 흥선의 얼굴에 아까 하인을 호령할 때에 나타났던 표정은 씻은 듯이 없어지고, 예사로운 얼굴로 자기를 쳐다보는 계월이를 마주 굽어 보았다.
그러나 계월이가 자세히 보매. 흥선의 얼굴에도 눈물 흘린 자취가 남아 있었다. 아까 묵연히 돌아서 있을 때에 남에게 감춘 그의 눈에서는 눈물이 흐른 것이었다.
“대감, 내려가셔요.”
“먼저 가라. 나야 걸어갈 사람―비가 오실 터인데…”
우덕덕 커다란 한 방울이 떨어졌다. 그것이 군호였다. 한 방울의 비를 앞잡이삼아 소나기는 드디어 쏟아지기 시작하였다. 우덕덕 뚝덕 좌―좌! 한 방울로 시작된 비는 한 순간 뒤에는 무서운 소나기로 변하였다.
“아이구, 이 비! 대감 어서 가세요.”
“내 걱정은 말고 먼저 가거라. 비라도 좀 맞아야겠다.”
속이 너무 탄다는 뜻으로 계월이는 들었다. 이 소나기에, 기다리던 계월이의 교군군은 또 달려왔다. 그것을 기회 삼아서 계월이는 흥선에게는 특별히 인사도 하지 않고 사인교에 몸을 실었다.
소나기 가운데로 달음질쳐서 사라져 들어가는 계월이의 사인교를, 흥선은 퍼붓는 소나기를 맞으면서 그냥 묵연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몸을 움직이려지도 않았다. 퍼붓는 소나기를 피하려지도 않았다.
흥선의 얼굴에서 줄줄 흘러서 땅으로 떨어지는 물―그것은 소나기뿐일까? 흥선의 비분의 눈물이 소나기에 감추어져서 함께 흐르는 것이 아닐까?
무서운 천둥 소리, 무서운 빗소리, 좔좔 골짜기를 흐르는 개울물 소리―이 가운데 흥선은 비를 겹다 하지 않고 죽은 듯이 서 있었다. 흥선이 겨우 그 곳서 발을 뗀 것은 계월이가 내려간 뒤에도 한참 지나서, 흥선의 초라한 옷은 속속들이 비에 젖어서 몸에 착 붙게 된 때였다.
필운대에서 내려오던 흥선은 도중에서 교군을 만났다. 계월이가 먼저 내려가서 흥선을 모시러 보낸 교군이었다. 비에 함빡 젖은 흥선은 계월이가 보낸 교군에 몸을 의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