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은 이날은 면회 일체를 사절하고 정선이와 단 둘이만 있는 날로 정해놓았다. 그래서 오늘은 정선에게 밭 구경과 야채 구경도 시킬 겸 데리고 나온 것이었다.

 

"다리가 아프지 않소"?

 

하고 숭은 언덕을 다 내려와서 아내에게 물었다.

 

"아프지는 않은데, 좀 내둘려."

 

하고 정선은 한 팔을 남편의 어깨에 걸치고 몸을 쉬면서 말하였다.

 

"방속에만 있다가 나오니까 그렇지. 힘들거든 도로 들어갈까"?

 

하고 숭은 팔로 정선의 허리를 껴안아서 아무쪼록 몸의 무게가 아픈 다리로 가지 아니하도록 애를 썼다.

 

그러나 그 손끝이 정선의 배에 닿을 때에 배가 부르다 하는 것을 숭은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정선도 통통하게 부른 제 배에 숭의 손이 닿을 때에 부지불식간에 몸을 비켰다. 그리고 낯을 붉히며,

 

"내 배가 부르지"?

 

하고 웃었다. 쓰기가 쑥물과도 같은 웃음이었다.

 

숭은 얼른 허리에서 손을 떼고,

 

"좀더 걸어갑시다."

 

하고 정선을 끌었다.

 

정선은 고개를 숙여 강물을 들여다보면서 남편이 끄는 대로 발을 옮겼다. 고무다리가 도무지 제 다리 같지를 아니하여 말을 잘 듣지 아니하였다.

 

정선은 뱃속에 아이가 펄떡펄떡 움직임을 느꼈다.

 

"여기가 작년에 우리 둘이 앉았던 데요. 자 여기 좀 앉을까."

 

하고 숭은 저고리를 벗어서 풀 위에 깔았다. 마른 풀 잎사귀 사이로 파릇파릇한 새 잎사귀들이 뾰족뾰족 나오고 개미들도 나와 돌아다녔다. 물속에는 천어들이 꼬리를 치며 오락가락하였다. 강 건너편에는 다른 동네 사람들이 실은 소 바리도 몰고 가고 더 멀리서는 밭 가느라고 "외나 외나!"하고 보잡이가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멀리 철로길에는 길다란 짐차가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숭이와 정선은 말없이 앉아서 강물을 들여다보았다.

 

기쁨에 찬 봄의 강물은 소리없이 흘렀다. 청춘이 흐르는 것이다. 인생이 흐르는 것이다.

 

살구꽃 한 송이가 떠내려온다. 잔 고기들이 먹을 것인 줄 알고 모여들어서 꽃을 물어 끌다가는 놓아버린다. 꽃은 물에 사는 모든 생명에게 봄 소식을 전하는 체전부 모양으로 고기들이 붙들면 붙들리고 놓으면 떠내려간다. 숭과 정선의 눈은 그 꽃송이를 따라서 흘러 내려갔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만은 꽃송이를 따라서 한가하게 흐르지를 못하였다.

 

정선의 뱃속에서는 운명의 어린아이가 펄떡거렸다.

 

"내가 왜 살아났어"?

 

하고 정선은 남편을 돌아보았다.

 

"왜 또 그런 소리를 하오"?

 

하고 숭은 정선의 눈물 괸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난 죽고만 싶어요. 내가 살면 무얼하오. 앞에 닥치는 것이 불행만이지. 당신에게는 귀찮은 짐만 되고. 지금이라도 죽고만 싶어."

 

하고 정선은 눈물을 떨어뜨렸다.

 

"왜 그러오? 여기서 이렇게 재미있게 살지. 봄이 오면 봄 재미, 여름이 오면 여름 재미. 그리고 당신 몸이나 추서면 무엇이든지 당신 하고 싶은 것이나 하구려. 아이들을 가르치든지, 부인네들을 가르치든지, 또 음악을 하든지, 글을 쓰든지 무엇이든지 당신 하고 싶은 것을 하구려. 그러느라면 또 재미가 붙지 않소? 그리고 또 중요한 일이 있지, 당신 할일이."

 

하고 숭은 아내의 마음을 눅이려는 듯이 빙그레 웃었다.

 

"무슨 일"?

 

하고 정선은 코를 풀면서 물었다.

 

"나를 사랑해주고 도와주는 것이지."

 

하고 숭은 정선의 낯에 덮인 머리카락을 올려주었다.

 

"내가 어떻게 당신을 사랑하오"?

 

하고 정선은 느껴 울었다.

 

"왜"?

 

"내가 당신을 사랑할 권리가 있어요"?

 

"그럼. 당신밖에 나를 사랑할 권리를 가진 사람이 없지, 이 하늘 아래는."

 

"내가 이렇게 다리 하나 없는 병신이라도."

 

"다리 하나 없는 것이 무슨 상관이요? 다리가 하나 없으니까 당신이 나만을 사랑할 수 있지 않소? 원래 당신은 너무 미인이거든. 이제 다리 하나가 없으니까 당신이 완전히 내 것이 되지 않았소? 그러니까 나는 만족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