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을 보더라도 선희가 어떻게 숭을 사랑하는지를 알 것이다. 그러나 선희는 비록 차중에서 취한 김에, 또 기생인 것을 빙자하고 한번 숭에게 매달려 입을 맞춘 일이 있다 하더라도 지금은 그러한 말이나 뜻을 내어서는 안된다고 굳게 맹세하였다.
이 까닭에 선희는 이웃에 있으면서도 일이 있기 전에는 숭의 집을 찾지 아니하였고, 찾더라도 숭이 집에 있을 때를 피하였다. 그러면서도 숭이 집에 있기를 바라는 선희의 정은 애처로왔다. 숭이 찾아와주기를 바라는 정은 간절하였다. 이 모순된 감정은 선희를 볶았다.
여름도 거의 다 지나간 팔월 어느날, 이날은 말복의 마지막 더위라고 할 만한 무더운 날이었다. 낮에는 여러번 우뢰, 번개를 함께 한 소나기가 지나갔건만 밤이 되어서는 도로 무더웠다.
유치원 아이들도 다 돌아간 뒤에는 이 외따른 유치원에는 사람 기척도 없었다.
선희는 저녁을 먹어치우고는 불도 켜놓지 않고 혼자 피아노를 치고 있었다. 이 곡조, 저 곡조 생각나는 대로 쳤다. 쳐야 들어줄 사람도 없는 곡조를.
사람을 두라는 것도 아니 두고 선희는 하면 철저하게 한다고 하여 밥 짓는 것, 빨래하는 것, 방 치고, 마당 치는 것, 아울러 다 제 손으로 하였다. 그리고 잘 때에만 젊은 여자 혼자 자는 것이 도리어 의심거리가 될까 하여 유월이를 불러다가 같이 잤다.
선희는 피아노를 치는 것도 지쳐서 부채를 들고 밖으로 나왔다. 비에 불은 달냇물이 소리를 내며 흘러내려가는 것이 들렸다. 달내의 바리톤 사이로 맹꽁이 테너와 먼 산의 두견조의 애끊는 알토도 들려오고 모기와 풀벌레들의 각가지 소프라노도 들려왔다.
음산한 바람결이 한번 휘돌면 굵은 빗방울이 콩알 모양으로 뚝뚝 떨어졌다. 하늘에는 구름이 뭉게뭉게 날아 달아났다. 땅 위에는 비록 바람이 많지 아니하더라도 하늘로 올라가면 센 모양이었다. 그뿐더러 검은 구름층이 간혹 터질 때면 밑의 구름은 서쪽으로 서쪽으로 흘러들어가는데 그 위층 구름은 북으로 북으로 흘러가고 또 잠깐만 지나면 구름의 방향이 바뀌었다.
하늘은 마치 뜻을 정치 못한 애인의 마음인 듯하였다. 게다가 이따금 어슴푸레한 달빛이 흐르는 것은 선희의 마음을 한없이 어지럽게 하였다.
갑자기 천지가 회명하여지고는 멀리 남섬에서 줄번개가 일어 마음심자 초를 한없이 그리며 동으로부터 서로 성급하게 달아난다. 그것은 하늘의 네온사인이요, 번개의 사랑의 암호와 같았다. 이 우뢰 소리도 아니 들리는 <소리없는 번개>는 선희의 마음을 더욱 괴롭게 산란하게 하였다.
마치 하늘과 땅의 이 모든 소리와 빛과 움직임은 무슨 큰 괴로운 뜻을 표현하려는 큰 사람의 번민과 같았다. 아무리 애를 써도 그 뜻이 통하지 못하여 구름의 방향과 속력을 고치고 번개의 획과 길이를 고치는 것 같았다. 그대로 뜻이 통하지 못하매 혹은 번개도 침묵해 버리고 혹은 굵은 빗방울도 뿌렸다. 그것은 애타는 큰 사람의 눈물인가.
선희는 이러한 속에 혼자 서서 슬퍼하였다.
선희의 숭에게 대한 애모는 갈수록 더욱 깊어갔다. 가슴에 감추고 나타내지 아니하는 것이 더욱 괴로왔다.
"못 볼 임을 보았네."
하는 것이 선희의 괴로움의 전체였다. 이 사랑은 죽이지 아니하면 아니된다. 영원히 죽이지 아니하면 아니된다.
선희는 북으로 숭의 집이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반쯤 등성이에 가리었으나 건넌방에서 불이 반짝거리는 것이 보였다. 그 건넌방에서는 숭이가 책을 보거나 사업설계를 하거나 협동조합 기타 공중, 공동사업의 문부를 꾸미거나 하고 있을 것이다. 그의 가슴속에 선희의 그림자가 있을까? 선희는 이렇게 생각해본다. 돌과 같이 굳고 얼음과 같이 찬 듯한 숭의 가슴속에 선희의 그림자가 있을 것 같지 아니하였다.
"아아 못 볼 임을 뵈었네."
하고 선희는 몸을 돌이켜 숭의 집 아닌 방향을 돌아보았다. 구름은 여전히 방향을 잃고 흐르고 남섬 번개는 애타는 네온사인으로, 알아주는 이 없는 암호를 그렸다가는 지워버리고 그렸다가는 지워버렸다.
"아아 애타는 번개여!
끝없는 괴로움의 암호여
알아줄 이도 없는 암호를,
썼다는 지우고 썼다는 지우네.
아아 임 그리는 내 마음과도 같아라."
이렇게 중얼거려보아도 시원치 아니하였다.
선희는 금시에라도 숭에게로 달려가서 그 가슴에 매어달리고 싶었다. 그래서 그 끝이야 어찌되든지 하고 싶은 말 다 해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선희는 그의 습관대로, You should not do that.(못한다!) 하는 종아리채로 마음의 종아리에서 피가 흐르도록 후려갈겼다. 선희는 살여울 온 뒤로 몇번이나 이 종아리의 상처로 전신의 피가 다 흘러내려도 돋는 사랑의 싹은 끊어버릴 길이 없었다.
"가는 정을 어찌하리. 돋는 사랑을 죽이는 것으로 일생의 길을 삼자."
하고 선희는 걸음을 빨리 걸으며 혼란한 구름의 길과 썼다가 지워버리는 번개의 암호를 바라보았다.
유월이가 왜 안 올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