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선은 스스로 제 잘못과 또 제가 이제는 하나도 취할 것이 없는 여자인 것을 깨달았을 뿐더러 지금까지 기생년이라고 속으로 천대하던 선희가 도리어 살여울 온 뒤에는 존경할 만한 여자가 되고 사업가가 된 것을 생각하면은 일종의 시기가 생기는 동시에 제 몸의 가엾음이 더욱 눈 띄어지는 것이었다.
숭은 아무 말이 없었다.
정선의 말은 숭의 마음을 꿰뚫어본 말이어서 그 말을 부인할 아무 재료가 없는 것이었다. 가만히 제 속에 물어보아도 정선을 불쌍히 여겨서 그의 일생을 힘있는 데까지 위로해주겠다는 생각은 있으나, 참으로 사랑의 정이 가지는 아니하였다.
가게 하려고 힘을 쓰면서 일생을 살아가자는 것이 숭의 속이었다. 그리고 할일이 많으니 사랑이라든지 정이라든지를 잊어버리자는 것이었다. 이것이 숭의 마음에 어두운 그림자를 이루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것이 폭풍우를 알밴 하늘 한구석의 구름장이 아닌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진통은 정선의 의식과 말을 중단하였다. 그러나 곁에서 보기에 정선의 마음에는 슬픔과 무서움과 절망과 혼란한 감정이 끓는 것 같았다.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사람에게 이렇게 비참한 고통은 있을 수가 있을까 할이만큼 정선은 고통하였다. 정선의 얼굴의 표정, 몸의 움직임, 이 모든것이 다 마치 고통이란 것을 표현하는 참혹한 무용인 것 같았다.
정선은 선희의 손을 잡고,
"선희, 나는 이 세상에서 용서해 줄 것이 있다면 다 용서해 줄테야. 누가 내게 어떠한 잘못이 있더라도, 나를 죽이려 한 사람이 있더라도 다 용서해 줄 테야. 그 대신 내가 지은 죄를 누가 다 용서해 주마 하는 이가 있으면 좋겠어. 아버지한테도 죄를 지은 년이요, 남편한테도 죄를 지은 년이요, 또 동무들한테도 죄를 지은 년이요, 뱃속에 있는 생명한테도 죄를 지은 년이 아니요, 내가?
그런데 내가 세상에 와서 스물 세 해 동안 한 일이 무엇이오? 세상 위해서 한 일이 무엇이오? 여러 사람들한테 폐만 끼치고 신세만 졌지, 한 일이 무엇이오? 내가 인제 하느님께 용서해 줍시사고 빈다고 용서해 주실 리 만무하지 않어? 아이구구, 아이구, 또 아퍼. 언제나 이 아픔이 그치나"?
하고 또 정선에게는 진통이 일어난다.
"선생님. 정선이를 다 용서한다고 해주셔요."
하고 선희는 정선이가 진통 끝에 의식을 잃고 조는 동안을 타서 숭에게 말하였다.
"쟤가 퍽 괴로와하는 모양입니다. 인제 정신이 들거든 다 용서하고 전같이 사랑해 주마고 말씀해 주셔요. 그러다가 죽어버린다면 그런 한이 있습니까. 그리고 또 무사히 아기를 낳고 일어나거든 선생님은 정선을 극진하게 사랑해 주세요. 선생님은 그만하신 너그러운 인격을 가지신 줄 믿습니다. 정선이가 불쌍하지 않습니까, 네"?
하고 눈물을 흘리고 느껴 울었다.
숭도 복받쳐오르는 울음을 삼키고 눈을 꽉 감아 눈에 괸 눈물을 막아 버리려 하였다. 그 눈물은 방바닥에 뚝뚝 떨어졌다.
"용서하지요. 사랑하지요."
하고 숭은 정선의 머리맡에 놓인 물그릇에서 물을 숟가락으로 떠서 정선의 입에 넣었다. 정선은 무의식적으로 물을 받아 삼켰다. 정선의 입술은 열병 앓는 사람 모양으로 탔다.
"날 용서하셔요."
하고 다시 정신을 차린 정선은 숭의 손에 매달렸다.
숭은 정선의 얼굴에 제 얼굴을 가까이 대고,
"정선이, 다 용서했소. 남편의 사랑은 무한이오. 한참만 더 참으면 고통이 없어질 것이오."
하고 말하였다. 닭이 울었다.
폭풍우도 어느덧 그쳤다.
처마 끝에서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새벽의 고요함을 깨뜨릴 뿐이었다.
"고맙습니다. 나는 인제는 죽어도 한이 없습니다. 당신밖에 나를 사랑해 줄 사람도 없고 용서해 줄 사람도 없으니 날 용서해 주셔요. 그리고 불쌍히 여겨 주셔요. 내가 죽거든 나를 당신이 늘 돌아볼 수 있는 곳에 묻어 주셔요. 그리고 조그마한 돌비에다 "허숭의 처 정선의 무덤"이라고 새겨 주셔요. 그리구, 그리구…선희하고 혼인해 주셔요."
하고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그 눈물은 지금까지 흐르던 고통의 눈물, 원한의 눈물은 아니었다. 그 눈물은 감사의 눈물, 만족의 눈물, 사랑의 눈물이었다.
선희는 정선의 말에 눈이 아뜩아뜩해짐을 깨달았다.
숭도 말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