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희는 제가 그렇게 많은 남자의 희롱을 받으면서 이렇게 순진한 생각을 남긴 것을 스스로 놀라지 아니할 수 없었다. 여자의 사랑은 아무 남자에게나 가는 것이 아니요, 반드시 어떤 특별한 남자에게만 가는 것인가 하였다. 다른 남자들을 대할 때에는 늘 냉정할 수가 있었다. 혹 얼마쯤 마음이 끌리는 남자가 그동안에도 없지는 아니하였지만 언제나 누르면 눌러지고 참으면 참아졌다.
그러나 숭을 대할 때에는 마음과 몸을 온통 흔들어놓는 것만 같아서 마치 배를 탄 사람이 배와 함께 아니 흔들릴 수 없는 모양으로 도저히 스스로 제 몸과 마음의 안정은 줄 길이 없었다.
"내 사랑은 임을 위해 있었네.
임을 못 본 제 없는 듯하더니
임을 뵈오매 전신을 태우네.
그것이 마치
봄이 오매 아니 피지 못하는 꽃과도 같아라."
하는 것과 같았다.
"그렇다 하면 조물의 악희로다.
하필 못 사랑할 임을 사랑하게 지은고"?
이러한 것과도 같았다.
이때에 유월이가 뛰어왔다.
"선생님 어서 오시라구요."
하고 유월이 씨근거렸다.
"왜? 왜 누가 날 오래"?
하고 선희는 괴로운 꿈에서 깨었다.
"우리 댁 선생님이요. 아주머니께서 배가 아프시다고."
하고 유월은 영감마님이니 마님이니 하는 말을 버린 것이 한껏 기쁘면서도 한껏 어색하여 함을 아직 버리지 못한다. 더구나 어려서부터 상전으로 섬기는 정선을 아주머니라고 부르는 것은 마치 큰 죄나 범하는 것 같았다.
"아주머니가 배가 아프시다고"?
"네에. 아까 저녁 잡수실 때부터 좀 이상하다고 하시더니 지금은 아주 대단하셔요."
하고 유월-지금 이름은 을란-은 말을 하면서도 염려되는 듯이 연해 집을 바라보았다.
선희는 문들을 닫고 우산을 들고 또 약이랑 주사약이랑 든 가방을 들고 아주 의사 모양으로 을란을 따라 숭의 집으로 갔다.
이러한 급한 일이 있어서 가는 길이건만 숭의 집이 가까울수록 가슴이 울렁거렸다. 을란을 따라왔던 강아지가 앞에서 돌아와가지고는 콩콩 짖었다. 숭은 마루 끝에 나서서 어두운 마당을 내려보았다. 등으로 불빛을 받고 선 숭의 모양은 선희가 보기에 마치 동상과 같았다.
"정선이가 배가 아파요"?
하고 선희는 침착하기를 힘쓰면서 묻고 숭의 힘 있는 팔을 스치며 마루에 올라섰다.
"대단히 아픈 모양인데요."
하고 숭은 선희를 앞세우고 안방으로 들어갔다.
"선희 왔어"?
하고 모기장 속에 누운 정선이가 선희를 보고 반갑게 말한다.
"응, 배가 아퍼"?
하고 선희는 모기장 곁에 꿇어앉는 자세로 정선을 들여다보았다.
"아이고, 아이고, 아이고!"
하고 정선은 미처 선희의 말에 대답도 하기 전에 진통이 왔다. 정선은 낯을 찌푸리고 안간힘을 썼다. 그것이 일분도 못 계속하건마는 정선의 이마에는 구슬땀이 돋았다.
"아이고, 아퍼. 이를 어째!"
하고 진통이 지나간 뒤에 정선은 슬픈 듯이 선희의 손을 잡았다.
"기쁨을 낳는 아픔이 아니냐. 참어. 그것이 어머니 의무 아냐"?
하고 선희는 위로하였다. 그러나 말끝에 곧 후회하였다.
정선은 과연 기쁨을 낳는 것일까? 저주를 낳는 것이 아닐까 하였다. 그런 생각을 하니 정선이가 불쌍하였다.
정선의 진통은 밤이 깊어갈수록 차차 도수가 잦고 아픔도 더하였다. 정선은 모기장을 다 잡아당기어 걷어버리고 이불을 차내버리고 몸이 나오는 것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였다. 더욱 괴로와하는 소리를 질렀다. 그가 잠이 들어도 드러내지 아니하던 끊어진 다리를 막 내어놓고 몸을 비틀었다.
선희는 이러한 광경을 처음 보았다.
"의사를 불러오지요."
하고 선희는 숭에게 말하였다.
"의사? 싫어 싫어."
하고 정선은 몸부림을 하였다. 그는 끊어진 다리를 보이기도 원치 아니할 뿐더러 자랑할 수 없는 아이를 낳으면서 의사요, 조산부요, 할 염치도 없었다.
"의사 부르면 난 죽어요!"
하고 정선은 야단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