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촌의 봄은 이렇게 일이 많으면서도 화평하였다. 그러나 정선의 마음은 결코 매양 화평하지는 아니하였다.
살여울에 오기는 크리스마스 일주일 전, 눈이 무릎 위에까지 올라오던 날이었다. 동네 앞까지는 자동차로 와서 거기서 집까지는 숭이가 정선을 업고 들어왔다. 동네 사람들이 백발치듯한 속에 남편의 등에 업혀서 오는 정선은 한없이 부끄러웠다. 왜 죽지를 아니하고 이 망신을 하는고 하고 자기를 살려낸 하느님을 원망하였다.
집에 온 후에 지금까지 숭은 정선을 마치 늙은 아버지가 어린 딸을 소중히 여기는 모양으로 소중히 여겼다. 대소변 시중도 숭이가 집에 있는 동안 결코 남의 손을 빌지 아니하였다. 대소변 그릇은 반드시 숭이가 손수 버리고 부시었다. 그만큼 숭은 정선을 소중히 여겼다.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정선의 마음은 더욱 괴로왔다. 정선의 지나간 죄된 생활이 양심을 찌르는 것도 있고, 제 몸이 병신이라는 것이 남편에게 대하여 미안한 것도 있지마는 다만 그것뿐이 아니었다. 정선은 태중이었다. 이 뱃속에 든 아이가 나는 날이 정선에게는 사형 선고를 받는 날인 것같이 생각혔다.
기차에 치이고 다리를 잘라도 뱃속에 든 생명의 씨는 떨어지지를 아니하고 자라고 있었다. 정선은 이 아이가 남편을 닮기를 바라고 빌었다. 그러나 그 아이가 남편을 닮을 리가 있을까. 아무리 생각하여도 그 아이가 남편을 닮을 리는 없었다. 그 아이는 꼭 김갑진을 닮았을 것이라고 생각할 때에 정선은 앞이 캄캄해짐을 깨달았다.
만일 정선이가 다리가 성하다면 벌써 달아났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달아나면 그가 어디로 가나? 생각하면 죽음의 나라밖에는 갈 곳이 없었다.
입덧이 나도 입덧 난다는 말도 못하였다. 입맛이 없고 상기가 되고 간혹 구역이 나더라도 그것을 다만 오래 자리에 누워 있기 때문에 소화불량이 된 것으로 알리려고 할 뿐이었다.
그렇지마는 오 개월이 넘으면서부터 배가 불렀다. 나와 다니지 아니하기 때문에 남의 눈에는 잘 뜨이지 아니한다 하더라도 남편의 눈에는 아니 뜨일 리가 없었다. 남편이 모르고 그러는 것인지, 알고 그러는 것인지 모르거니와 남편은 도무지 아무러한 말도 없었다. 도리어 그에게 남편이,
"이년, 이 뱃속에 있는 것이 어떤 놈의 아이냐"?
하고 야단을 해주었으면 견디기가 쉬울 것 같았다.
뱃속에 어린애가 꼬물꼬물 놀 때에 정선은 어머니의 본능으로 어떤 기쁨을 깨닫지마는 다음 순간에는 그것이 무서움으로 변하였다. 아이는 어미 생각도 모르고 펄떡펄떡 놀았다.
"김갑진이 닮아서 이렇게 까부나."
하는 생각을 아니하지 못하는 신세를 정선은 슬퍼하였다.
만일 어머니가 살아계시다면 이런 설화라도 하련마는 하고 정선은 슬퍼하였다.
게다가 정선에게 불안을 주는 것은 선희와 순의 존재였다. 정선이가 살여울 온 지 한달 동안은 선희나 순이나 다 정선의 집에 있었으나 숭이 정선의 심경을 동정하고 그럼인지 숭은 한갑의 집을 수리하고 한갑 어머니, 선희, 순을 그 집에 거처하게 하고 땅이 풀리고 밭갈이나 끝이 나면 유치원 겸 선희의 주택을 짓기로 계획하였다.
이처럼 선희와 순을 딴 집에 있게 한 것을 정선은 대단히 고맙게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이었다. 뱃속에 아이가 자라는 대로 선희와 순은 남편에게 대하여 무서운 적인 것같이 정선이에게 생각혔다.
"아아, 나는 어찌하면 좋은가."
하고 정선은 혼자서 울 때가 많았다.
정선은 고무다리를 쓰는 연습을 하였다. 아무도 없는 데서 하는 것이 예였다. 남편이 붙들어주는 것조차 부끄러웠다. 유월이가 보는 데서도 이 고무다리를 대기가 싫었다. 이 고무다리를 대고 일생을 살아가지 아니치 못할 것을 생각하면 하늘과 땅이 없어지는 것 같았다.
숭이 정선을 사랑하는 것은 참으로 극진하였다.
날 따뜻한 어느 일요일 아침에 숭은 정선에게 고무다리를 대어주고 마쓰바즈에라고 일본말로 부르는 겨드랑에 끼는 지팡이를 숭이가 들고 한 손으로 정선을 부액하여 가지고 강가로 산보를 나갔다. 유월이도 데리지 아니하고.
이날은 온 동네가 하루 쉬는 날이다. 사람도 쉬고 소도 쉬는 한달에 두 번 있는 날이다. 농부들도 이날만은 늦잠도 자고 집에서 오래 못 만나던 자녀들도 만나는 날이다. 다른 날은 아이들이 눈을 뜨기 전에 나가고 아이들이 잠든 뒤에 들어오는 것이 상례일 뿐더러 설사 눈뜬 뒤에 나가고 잠들기 전에 들어온다 하더라도 불이 없는 방안에서는 서로 음성은 들어도 용모는 보기가 어려웠다. 한 집에 보름 만에 한번 낯을 대하는 기쁨이 이날에 있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