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참으로 기쁜 날입니다."
하고 작은갑은 입을 열었다. 동네 아이들도 무슨 구경이나 났는가 하고 기웃기웃 들여다보았다. 머리들이 자라고 때가 끼고 모두 귀신같이 되어버린 아이들이다. 숭이와 선희가 있을 때에는 아이들은 이렇지 아니하였다.
"유정근 선생이…."
하고 작은갑이는 뒤에 앉은 정근을 바라보며,
"우리 살여울 동네를 위하여 돈 육만 원을 내어놓으시기로 하셨습니다. 삼만 원은 교육 자금으로, 삼만 원은 협동조합 자금으로, 육만 원을 내어 놓으시기로 하였습니다. 오늘 아침에 이 사람을 부르셔서 이렇게 자필로 증서를 쓰셨습니다."
하고 정근이가 손수 쓴 증서를 낭독하고 그것을 여러 사람에게 보인 뒤에,
"그뿐 아니라 우리 살여울 동네 사람에게 지운 빚 일만 육천 원을 모두 탕감해 주시기로 하고, 여기 이렇게 표지를 다 내놓으셨습니다. 이것은 회가 끝난 뒤에 각각 나오셔서 우리 유정근 선생님께 고맙다는 말씀을 드리고 찾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유정근 선생이 그 동안에 우리 동네에서 원망을 받으신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오늘에 와서 우리는 그 불쾌한 묵은 기억을 다 달냇물에 띄어 내려보내고 오늘부터 새로이 우리 은인이요, 우리 동네에 은인인, 유정근 선생을 새로 맞게 되었습니다."
"유정근 선생은."
하고 다른 종이 조각을 꺼내며,
"우리 지도자 허숭 선생에게 미안한 일을 하셨다는 것과 또 백선희 선생과 맹한갑군에게도 미안한 일을 하셨다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에 이 모든것을 잊어버리지 아니 하면 아니 됩니다. 우리는 기쁘게 이 불쾌한 모든 기억을 잊어버립시다. 허숭 선생이 앞으로 이태 동안 더 옥중의 고초를 보시더라도 유정근 선생이 이런 고마우신 크신 일을 하셨다는 말을 들으면 기뻐하실 줄 믿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일제히 일어나서 유정근 선생에 고맙다는 뜻을 표합시다."
하고 손을 드니 모인 사람들이 다 일제히 일어난다.
"원, 이런 고마운 일이 어디 있나."
하고 눈물을 흘리는 노인도 있었다.
"다들 앉으십시오."
하고 작은갑은 정근을 향하여 고개를 숙이며 인사말을 하라는 뜻을 표한다.
정근은 일어나 읍하고,
"나는 그 동안 지은 죄가 많습니다. 첫째로 옳은 사람들을 모함했고, 그 밖에도 지은 죄가 많습니다. 나는 작은갑군 때문에 눈을 떴습니다. 작은갑군에게는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지었건마는 작은갑군은 나를 용서하셨습니다. 작은갑군은 내게는 재생지은을 주신 이입니다.
동네 여러 어른들께도 지은 죄가 태산 같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다 내가 철이 안 나서 그러한 것입니다. 이제로부터서 나는 있는 힘을 다해서 우리 살여울 동네를 위해서 힘쓰고자 합니다.우리 살여울 동네가 조선에 제일 넉넉하고 살기 좋고 문명한 동네가 되도록 있는 힘을 다하려고 합니다."
하고 정근은 북받쳐 오르는 눈물을 삼키느라고 잠깐 말을 끊었다.
정근은 눈물을 삼키고 나서,
"저는 이제 여러분 앞에 자백합니다. 첫째로 유순은 애매하였습니다. 허숭군이 미워서 허숭군을 잡느라고 내가 한갑에게 없는 소리를 하였습니다. 유순을 죽인 것은 이놈입니다."
하고 제 가슴을 가리키며,
"그리고 허숭군이나 한갑이나 백선희씨나 여기 계신 작은갑씨나 다 애매합니다. 나는 처음 일본서 돌아와서 허숭이가 동네에서 채를 잡은 것을 보고 불쾌하였습니다. 그리고 우리집이 허숭이 때문에 못 살게 된다고 생각하고 허숭씨를 미워했습니다. 옳은 사람을 모함한 나는 소인입니다. 죄인입니다. 열번 죽어도 아깝지 아니한 죄인입니다.
만일 허숭씨나 한갑씨가 경찰에서나 검사국에서나 예심정에서나 공판에서나 내 말을 하였다 하면 그이들은 다 무사하고 나는 무고죄로 몰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허숭씨는 일절 그러한 말을 입 밖에도 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이 몹쓸 놈은 그것을 다행으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내게도 양심은 있어서 자나깨나 괴로왔습니다. 순이가 밤마다 꿈에 나를 원망했습니다. 순이는 내 열촌 누이가 아닙니까.
나는 이제 모든 죄를 자백합니다. 나는 작은갑씨에게도 큰 죄를 지었습니다. 그 죄가 무슨 죄인 것은 말하지 아니하겠습니다마는 죽어도 마땅한 큰 죄를 지었습니다. 그런데 작은갑씨는 나를 용서하셨습니다. 나는 내 모든 죄를 자백하였습니다. 나는 이제 잡혀가서 징역을 져도 좋습니다. 그것이 도리어 맘에 편하겠습니다. 나는 하루도 마음 편할 날이 없었습니다.
맘 편할 날이 없었기 때문에 더욱 죄만 지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오늘 모든 죄를 자백하였습니다. 여러 어른께서 나를 때리시든지 죽이시든지 마음대로 하시기 바랍니다. 나는 백번 죽어도 아깝지 아니합니다. 만일 목숨이 남으면 나는 살여울 동네를 위해서 허숭군이 하던 일을 따라 가겠습니다. 그러나 나는 죄 많은 놈이라 무슨 낯을 들고 그런 일을 하겠습니까."
하고 정근은 울음에 소리가 막힌다.
임석한 경관들은 서로 돌아보며 눈을 꿈적거린다. 청중들도 모두 복잡한 감정에 잠겨 있었다.
정근은 눈물을 씻으며,
"지금 작은갑씨가 말씀한 것은 다 내 뜻입니다."
하고 더 말할 수가 없이 감정이 혼란하여 밖으로 나가버린다.
방에서는,
"유정근이 만세."
하고 외치는 소리가 세 번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