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근은 작은갑의 태도에 놀랐다. 첫째로 작은 갑이가 칼을 들고 저를 죽이러 온 것은 아내에게 대한 분풀이거나 그렇지 아니하면 아내와 정근과의 간통을 이유로 돈이나 달랠 것으로 생각하였다. 이에 대해서 정근은 논이나 여남은 마지기 주기로 결심까지 하였었다.

 

그러나 작은갑은 이에 대하여는 한 마디도 비치지 아니하였다. 그의 요구는 자초지종으로 순전히 동네를 위한 것이었다. 살여울 동네를 위한 것이었다. 정근에게는 이런 일은 상상할 수 없는 의외의 일이었다. 자기 같으면 이런 좋은 기회를 이용하여 돈 몇천 원 떼어낼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삼만 원으로 조합 기금을 삼고, 삼만 원으로 교육 기관을 세우라는 것은 그리 어려운 조건은 아닌 것 같았다. 정말 그렇게 해 보고 싶은 생각도 났다.

 

"그럼 자네는 무고죄로 나를 고발하지 않겠나"?

 

하고 정근은 작은갑에게 다짐했다.

 

"자네가 지금 약속한 일만 한다면야 고발이라니 말이 되나. 내가 자네 집 심부름을 해주어도 싫지 않지."

 

"또 내가 자네 부인과-아무 일도 있는 것은 아니지마는 혹시 오해로라도 말야-그런 일을 문제로 만들지 않겠나"?

 

"자네가 지금 약속한 일만 한다면야 절대로 그런 일은 없지."

 

"고마우이. 그럼 내 약속대로 함세. 나도 사람 아닌가. 나도 오늘 자네 정성에 감격했네. 저를 잊고 동네를 생각하는 그 의사적 풍도에 감격했네."

 

하고 정근은 겨우 떨던 몸이 진정되고 또 파랗던 입술에 핏기가 돌며 손을 내어밀어 작은갑의 손을 청하였다. 작은갑은 쾌하게 손을 내밀어서 정근의 손을 잡아 흔들었다.

 

"자네가 만일 약속대로 아니하는 날이면 이것은 언제나 자네를 위해서 내가 가지고 있네. 오늘 동네를 모아서 동네에 이 일을 발표하세. 좋은 일이란 마음 난 때에 해버려야 하는 것이야. 그럼, 내 가서 일들 다 나가기 전에 동네 사람들을 유치원 집에 잠깐 모아 놓겠네. 자네가 모이란다고, 자네 심부름으로."

 

하고 작은갑은 일어나서 정근의 집에서 나왔다. 정근은 거절할 용기가 없었다.

 

작은갑은 동네 집집에 다니며 정근의 뜻을 대강 말하고 모두 유치원으로 모이라고 하였다.

 

동네 사람들은 반신반의로 어리둥절하였다. 천하에 돈밖에 모르는 정근이가 무슨 흉계를 피우는 것인가 하면서도 유치원으로 모였다.

 

한 시간이 다 못해 작은갑은 다시 정근의 집으로 왔다. 정근은 바로 밥술을 놓고 있었다.

 

"다들 모였네. 모두 칭송이 자자하이."

 

"좀 앉게."

 

하고 정근은 어쩔 줄 모르는 듯이 작은갑을 바라보았다.

 

"앉을 새 있나? 어서 가세."

 

하고 작은갑은 선 채로 정근을 재촉하였다.

 

정근은 두루마기를 떼어 입고, 모자를 쓰고 작은갑을 따라나섰다.

 

유치원 마당에는 사람들이 모여서 웅성거리고 있었다. 모두들 영양불량으로 얼굴에는 핏기가 없고 다리들도 가늘었다. 사흘을 더 살 수가 없을 것같이 참혹하였다. 모인 사람 중에는 아침을 굶은 사람도 있었다. 만일 오늘도 정근이가 좁쌀 창고를 열지 아니하면 자기네끼리 모여서 창고를 깨뜨리고 꺼내 먹자는 의논까지도 있었다. 눈앞에 먹을 것을 두고도 굶어 죽을 수는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다들 들어가십시다."

 

하고 작은갑은 사람들을 방으로 들이몰았다. 사람들은 정근을 흘끗흘끗 바라보며 방으로 들어갔다.

 

사년만에 처음으로 모이는 모임이다. 숭이가 이 동네에 있을 때에는 가끔 동네 일을 의논하느라고 모였으나 숭이가 잡혀간 뒤로는 한번도 모여본 일이 없었다.

 

유치원은 벽이 떨어지고 비가 새고 먼지가 겹겹이 앉았건마는 아무도 돌아보는 이가 없었다. 마당에는 풀이 무성하였다. 선희는 어제 감옥에서 돌아오는 길로 이 모양을 보고 울었다.

 

작은갑은 사람들이 다 자리에 정돈하기를 기다려서 사회자석에서 일어섰다. 그 곁에는 주재소에서 감시하러 온 경관이 둘이나 정모를 쓴 채로 앉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