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학생 첩이 덜덜 떨고 엿듣고 있다가 쏜살같이 대문 밖으로 뛰어나간다. 주재소로 가려는 것이다.

 

"오 주재소에 보냈구나, 그렇지만 순사가 오기 전에 너는 벌써 죽었을걸."

 

하고 작은갑은 칼을 들고 정근에게 대들었다.

 

정근은,

 

"여보, 가지마오! 이리 오오."

 

하고 학생 첩을 불렀다. 그리고는 더 말도 못하고 작은갑의 앞에 합장하고 빌었다.

 

여학생 첩은 남편이 부르는 소리를 듣고는 돌아 들어왔다. 들어와서 작은갑의 앞에 엎드려서 빌었다. 말은 못하고 그저 수없이 절을 하였다.

 

"이놈, 너는 법률밖에는 무서운 것이 없는 줄 아니? 세상에는 법률보다 더 무서운 것도 있다."

 

하고 작은갑은 을렀다.

 

"응 알았네, 알았어. 내 자네 하라는 대로 함세. 저 종이하고 내 만년필 하고 가져와. 자 불러요, 내 쓸 테니. 무에라고든지 자네가 쓰라는 대로 쓸 테니. 자 그 칼은 좀 놓아요. 내가 이거 손이 떨려서 어디…."

 

하고 정근은 종이를 앞에 놓고 붓을 든다.

 

작은갑은 잠깐 주저하더니,

 

"그래 써라. 허숭과 협동조합을 모함한 것은 전연 무근한 것을 네가 지어낸 것이지? 내 말을 받아 써!"

 

정근이가 떨리는 손으로 받아 쓴다.

 

"인제 내가 물은 말에 네 대답을 써라. 털끝만치도 속이면 안돼!"

 

하고 작은갑은 칼을 흔든다.

 

"그렇소."

 

하고 정근이가 답을 쓴다.

 

"왜 무근한 소리를 했어"?

 

"협동조합이 생기기 때문에 영업에 방해가 되고, 허숭씨가 동민의 존경을 받는 것이 미워서 그랬소."

 

하고 정근은 똑바로 쓴다.

 

"허숭을 감옥에 보낸 뒤에 고리대금과 부정 수단으로 모은 돈이 얼마나 되나"?

 

하고 작은갑이가 묻는다.

 

"한 오륙만 원 되오."

 

"그만만 되어"?

 

"아니, 실상 그밖에 안되네. 게서 더 될 게 있나"?

 

하고 정근은 입으로 대답한다.

 

"지금 동민에게 지운 채권은 얼마나 되고."

 

"일만 한 팔천 원 되오."

 

"그 나머지는 다 청산하고"?

 

"그렇소. 더러는 부동산을 사는 형식을 취하고, 더러는 강제 집행을 하여서 다 청산을 하였네."

 

"고대로 써!"

 

정근은 그 말을 쓴다.

 

"그러면, 이 자리에서 그 일만 팔천 원 채권은 포기하고 그 동안에 모은 육만 원에서 절반 삼만 원은 동네 교육 기금으로, 또 절반 삼만 원은 협동조합 기금으로 내어놓는다는 표를 쓰게."

 

"이 사람, 그렇게 다 내놓으면 나는 무얼 쓰고 사나"?

 

"자네는 본래 재산도 있고, 또 협동조합을 하거든 거기 일 보고 월급 받지."

 

정근은 작은갑이가 시키는 대로 삼만 원은 동네의 교육 자금으로, 삼만 원은 식산 자금으로 살여울 동네에 기부한다는 표를 쓰고, 연 월 일 씨명을 쓰고 도장을 찍고, 증인으로는 학생 첩이 도장을 찍고, 또 작은갑이가 도장을 찍었다.

 

작은갑이는 이러한 일이 어떻게 하면 법률상 효과가 생기는지를 잘 몰랐다. 다만 도장 한번 찍은 것이 오늘날 법률에는 면하지 못할 책임을 지는 것을 여러번 보아 왔었다.

 

정근은, 자기가 비록 이렇게 증서를 쓰고 도장을 찍는다 하더라도 나중에 협박으로 된 것이라는 한 마디면 이 일이 뒤집혀질 것을 잘 안다.

 

작은갑은 정근이가 쓴 표를 받아서 집어 넣고 칼을 수건에 싸서 조끼 주머니에 집어넣고 나서 정근의 손을 잡으면서, 친구다운 태도로,

 

"여보게, 자네가 정말 이 표대로만 하면야 이 동네에서 자네네 부자 생사당 짓고, 동상 해 세우지 않겠나. 그리 되면 자네 집도 잘 살고 동네도 잘 살지 않겠나. 꼭 이 약속대로 하여주게."

 

하고 손을 잡아 흔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