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방골 현 의사는 일찍 저녁을 먹고 등교의에 누워서 선풍기 바람을 쐬고 있다. 현 의사는 사오 년 전보다는 뚱뚱해졌다. 그러나 남자도 모르고 아이도 아니 낳아 본 그는 중년 여성의 태가 있는 중에도 처녀와 같은 데가 어딘지 모르게 있었다.
현 의사는 옛날 모양으로 탁자 위에 즐겨 하는 울릉차 고뿌를 놓은 채로 요새에 와서 맛을 붙인 웨스트민스터를 피우고 있었다.
"길아, 누가 오셨나보다."
하고 현 의사는 고개를 들었다.
소리에 응하여 뛰어나오는 사람은 십 육칠 세나 되어 보이는 흰 양복 입은 미소년이었다. 계집애는 낫살만 먹으면 서방 얻어가는 것이 밉다고 하여 사내아이를 두는 것이 요새 현 의사다. 길이란 이 사내아이의 이름이다. 현 의사는 이 아이를 고르는 것을 마치 미술품을 고르는 것 모양으로 살빛을 보고 골격을 보고 손발을 보고, 눈, 코, 입을 보고 음성을 보고 별의별 것을 다 보아서 고른 것이다.
"네"?
하고 길이가 현 의사의 곁에 오는 것을 현 의사는 담뱃내를 길의 낯에 푸하고 뿜으며,
"귀먹었니? 대문에서 누가 찾지 않어"?
하고 길의 볼기짝을 때린다.
"오, 또 이 박사가 왔군."
하고 길은 댄스하는 보조로 걸어 나간다.
과연 이 박사였다.
"굿 이브닝 닥터."
하고 이 박사는 단장을 팔에 걸고 파나마를 벗어 번쩍 높이 든다.
"글쎄, 왜 순례 같은 여자를 버려"?
하고 현 의사는 누운 채로,
"어때? 인제야 이건영이가 심순례 신들은 매겠소? 흥, 앙아리 보살이 내렸지. 백주에 그런 여자를 마대. 그리구는 그게 뭐야. 이 계집애 저 계집애, 나중에는 남의 유부녀 궁둥이까지 따라다니니 흥. 어때"?
하고 피에드네(서양식 아옹)를 해보인다.
"닥터, 이건 너무하지 않으시우"?
하고 이 박사는 싱글싱글 웃는다.
이 박사도 그 동안에 몸이 나고 얼굴에는 마치 술꾼이나 건달에게서 보는 뻔질뻔질한 빛이 돈다. 오륙 년 전의 얌전하던 빛, 점잖던 빛은 다 없어졌다.
이 박사는 신발 신은 채로 한 발을 마루에 올려놓고 탁자 위의 웨스트민스터갑을 집으며,
"글쎄, 여자는 여자답게 가늣한 궐련을 먹는 게지, 웨스트민스터가 다 무에야."
하고 한 개를 꺼내어 입에 문다.
"흥, 무슨 상관야. 오늘도 어디서 한잔 자셨구려"?
하고 현 의사는 담뱃불을 이 박사에게 준다.
"인생에 실패한 나 같은 사람이 술이 아니면 무엇으로 사오? 당신이나 내나 다 인생에 패군지장이어든."
하고 맛나는 듯이 담배를 깊이 들이빤다.
"당신이나 패군지장이지 내가 왜 패군지장이오? 나는 당신네 같은 패군지장을 구경하고 사는 사람이라나."
"길아!"
하고 이 박사는 길의 손을 잡아 끌며,
"나는 네가 부럽고나."
하고 싱글싱글 웃는다.
"왜요"?
하고 길은 무슨 장단을 맞추어 몸을 우쭐거린다.
"너는 이런 주인아씨 같으신 미인 곁에 밤낮 있으니까 부럽지 아니하냐, 하하하하."
하고 길의 어깨를 툭 치고는 현 의사를 향하여,
"자 나서우!"
하고 재촉한다.
"어디를"?
"음악회."
"심순례 독주회"?
"슈어. 이렇게 표 두 장 사가지고 왔습니다."
하고 표를 내보인다.
"그래, 순례 음악회에를 갈 테야"?
하고 현 의사는 기가 막힌 듯이 웃으면서 몸을 반쯤 일으킨다.
"왜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유학을 하고 돌아와서 영광스러운 독주회를 한다는데 내가 안 가고 누가 가요"?
하고 이 박사는 뽐낸다.
"사랑하는 사람? 흥? 이 박사야 치마만 두른 사람이면 다 사랑하지? 비짜루에 치마를 둘러도 사랑할걸? 흥, 그 싸구려 사랑. 대관절 이 박사가 미국서 돌아온 후로 모두 몇 여자나 사랑하셨소? 몇 여자나 버려 주고, 몇 여자에게서나 핀둥이를 맞았소"?
"이거 왜 이러시우"?
하고 이 박사는 약간 무안한 빛을 보인다.
"이거 왜 이러시우가 아니요. 인제는 사람 구실을 좀 해보란 말이요. 그러다가 인제 텍사스에서까지 쫓겨나지 말구. 오, 참 거기 타이피스트를 또 사랑한답디다그려. 괜히 그러지 말고 다 늙어 죽기 전에 다만 며칠만이라두 사람 구실을 좀 해보아요. 세상에 왔다가 한번도 사람 구실을 못해 보고 간데서야 섭섭하지 않소"?
하고 현 의사는 차 한 모금을 마시고 볼 일 다 보았다는 듯이 또 드러눕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