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순간에 순례의 손은 들렸다. 열 손가락이 하얀 건반 위로 날았다. 방안은 고요하였다. 마치 아무것도 없고 순례가 치는 소리만이 유일한 존재인 것 같다.
한 곡조가 끝날 때마다 박수가 일어났다.
순례가 뒷방에 들어오면 순례를 딸이라고 하는 홀 부인은 순례를 껴안고 눈물을 흘리고, 순례를 사랑하는 동창들도 순례를 안고 기뻐하였다.
<아아 그 나라>가 연주될 때에는 청중은 거의 숨이 막힌 듯하였다. 그 곡조가 끝나도 청중은 박장하는 것조차 잊어버린 듯하였다. 그러다가 순례가 무대로부터 사라진 뒤에야 끝없이 박수를 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순례는 울려오는 박수 소리를 들으면서도 마음에 누를 수 없는 슬픔이 있었다. 거의 기절할 것같이 기운이 빠짐을 깨달았다. 동창들은 부채를 부쳐주고 땀을 씻어 주었다. 그러나 순례의 가슴에는 명상할 수 없는 고적과 슬픔이 있었다.
한 선생이 들어와서 순례의 손을 잡고 칭찬의 말을 할 때에 순례는 더 참을 수 없어 소리를 내어서 울었다.
마지막은 <사랑하는 이의 슬픔>이다. 이것은 순례가 이 박사에게 버림을 받았을 때에 지은 것을 미국에서 몇군데 수정한 것이다. 순례는 이 곡조를 아니하려 하였으나 홀 부인이 굳이 권하기 때문에 프로그램에 넣은 것이었다.
순례는 마지막으로 피아노 앞에 앉았다.
곡조는 끝났다. 아아 어떻게 애틋한 선율이냐. 청중은 일제히 한숨을 쉬었다.
순례가 피아노에서 일어서려 할 때에 청중에서 꽃다발을 들고 무대에 뛰어올라 순례 앞을 막아서는 이가 있었다. 그것은 이 박사였다.
이 박사는 꽃다발을 순례의 앞에 내어밀었다. 순례는 무심히 꽃을 받아들고는 깜짝 놀라며 뒤로 물러섰다. 다음 순간에 순례는 꽃다발을 무대 위에 내어던지고는 두 손으로 낯을 가리고 비틀비틀 쓰러지려 하였다.
쓰러지려는 순례는 A교수의 팔에 안기어 뒷방으로 옮김이 되었다. 청중이 일어섰다. 그 중에서,
"저놈 끌어내려라. 저 색마 이건영이놈을 끌어내려라."
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건영이가 무대 위에서 갈팡질팡할 때에 무대 밑으로서 어떤 노인이 뛰어 올라와 이건영의 멱살을 붙들고 따귀를 수없이 갈겼다. 그 노인은 순례의 아버지였다.
"이놈, 오늘 내 손에 죽어라."
하고 노인은 소리를 질렀다.
몇 사람이 뛰어나와서 노인을 안고 이건영을 붙들어 내렸다. 임석 경관이 나서서 청중에게는 해산을 명하고 노인과 이건영을 붙들었다.
순례는 현 의사의 손에 치료를 받았다. 십 분 후에는 회장은 고요하게 되고 뒷방에만 순례의 어머니와 홀 부인과 현 의사와 한 선생과 사랑하는 친구 몇사람이 말없이 순례가 정신을 차리기를 기다렸다.
"그놈이, 그놈이 어쩌면 또 나선단 말이냐. 그 마귀놈이, 그 죽일 놈이."
하고 순례의 어머니도 울었다.
이십 분이나 지나서 순례는 정신을 차렸다. 현 의사가 안동하여 자동차를 타고 순례는 집으로 돌아왔다.
순례는 아무 일도 아니 생긴 것처럼 한잠을 잤다. 그리고 잠이 깬 때에는 대청의 시계가 두시를 치고 창에는 달이 환하게 비치었다.
순례는 일어나 안방에 들리지 않게 가만히 창을 열었다. 하늘에는 여기저기 구름 조각이 떠 있으나 여름 달이 휘영청 밝았다.
순례는 문지방에 몸을 기대어 멀거니 하늘을 바라보았다. 안방에서는 아버지의 코고는 소리가 들렸다. 순례가 정신없이 잠든 동안에 아버지는 경찰서에서 나온 것이다.
"그 놈이 내 딸 속인 놈이오. 그놈이 여러 계집애를 버려 준 놈이요. 그놈이 세상에 나와 돌아다니면 내 딸이 언제 또 그 변을 당할는지 모르고, 또 남의 딸을 얼마나 더 버려 줄는지 모르니 그놈을 꼭 잡아다가 가두고 내놓지를 말아 주시오."
하고 순례의 아버지는 경관에게 순박한 말을 하였다. 그리고는 다시는 사람을 때리지 말라는 말을 듣고 놓여 나왔다. 나와서는 딸이 편안히 잠들어 자는 것을 들여다보고 내외가 늦도록 이야기를 하다가 막 잠이 든 것이었다.
"그놈을 죽여버리고 마는 것을."
하고 아버지는 잠꼬대로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