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내 정선의 차례가 왔다.

 

"윤정선. 한민교."

 

하고 두 사람은 함께 불렸다. 정선과 한 선생은 각각 간수가 지시하는 창 앞에 가 섰다.

 

이삼 분이나 지났을까 한 때에 정선의 앞에 있는 창이 덜컥하고 위로 올라가고 거기는 숭의 얼굴이 나타났다.

 

"왔소"?

 

하고 숭은 반가운 웃음을 띠었다.

 

"몸은 괜찮으시우"?

 

하고 정선은 울렁거리는 가슴을 억지로 누르면서 첫 말을 내었다.

 

정선은 눈에서 눈물이 쏟아지려 하는 것을 간수가 주의하던 말을 듣고 억지로 참았다.

 

"나는 괜찮아요. 선(善)이 잘 노우"?

 

하고 숭은 아내에게 묻는다. 선이란 정선이가 낳은 어린애의 이름이다. 호적에는 물론 숭의 맏딸로 되어 있다.

 

"네."

 

하고 정선은 울음 섞어 대답하였다.

 

"어떻게 하려오. 서울로 올라가시려오? 편할 대로 하시오."

 

하고 숭은 정선의 말문을 열려고 애를 쓴다.

 

"난 서울 안가요. 살여울서 농사짓고 있을 테야요. 작년에도 나허구 을란이허구 둘이서 농사를 지어서 벼 스무 섬하구, 조 열 섬, 콩 두 섬 했답니다. 금년에두 농사를 벌여 놓았는데 모도 절반이나 나구…. 난 밥을 짓고 소 먹이지요. 내 손을 좀 보아요."

 

하고 꺼멓게 걸고 거친 손을 가지런히 숭의 눈앞에 내어 보인다.

 

"정말!"

 

하고 숭은 고개를 앞으로 숙여서 정선의 손을 보았다. 조그마한 손이 커질 리는 없지마는 피부는 많이 거칠었다.

 

"그럼, 이제는 나도 농사를 많이 배웠어요. 소만에 목화 심고 망종에 모내고…."

 

하고 정선도 웃었다.

 

"오라잇. 그러면 내가 나가도록 살여울을 지키시오!"

 

하고 숭은 더욱 유쾌하게,

 

"그래, 손수 지은 쌀로 손수 지은 밥맛이 어떻소? 서울서 먹던 밥맛과"?

 

하고 숭은 소리를 내어 웃었다.

 

"아주 맛나요. 당신만 집에 같이 계시면 얼마나 더 맛날까. 호박잎 된장찌개가 아주 훌륭하게 맛나. 김매다 말고 밭머리에서 먹는 밥도 먹어보았지요. 아주 맛나. 소화불량도 다 없어졌어요. 난 이제 아무 걱정도 없어요."

 

하고 정선은 정말 아무 걱정도 없는 모양을 보인다.

 

"구웃! 동네엔 별일 없소"?

 

하는 숭의 말에는 대답도 아니하고,

 

"왜 공소를 안한다고 그러시우? 공소를 해보시지. 무슨 까닭으로 오년이나 징역을 사시우"?

 

하고 정선의 얼굴에서는 잠시 있던 유쾌한 빛이 다 사라지고 만다.

 

"공소할 필요가 없으니까 안하는 게지."

 

"그러기로 오년씩이나."

 

"할 수 없지요. 오년 동안에 공부나 잘하지, 아직 젊었으니까. 아무 걱정 말고 농사나 잘 배우시오. 서울 기별했소"?

 

"기별은 안했지마는 신문을 보기로 모르셨을라구. 아시면 무얼하우. 이제는 아버지도 우리를 잊으시고 우리도 아버지를 잊어버린걸."

 

"정근이 그저 동네에 있소"?

 

"있지요. 식산조합이라고 해가지고는 집이랑, 땅이랑 저당을 잡고는 삼푼 변 사푼 변에 돈을 꾸어 주고, 동네 사람들은 그 돈을 가지고 잔치하고 술 먹고 야단이랍니다. 그리고 저당할 것 없는 사람은 장리라는가 하는 것을 주는데, 이른 여름에 벼 한 섬을 주면 가을에 가서 벼 두 섬을 받는다구요. 작년에도 장리벼를 못 물어서 그것을 금년까지 지고 넘어온 사람이 여럿이랍니다."

 

정선의 이 설명을 듣고 숭은 다만 고개를 끄덕끄덕할 뿐이었다.

 

"간단히, 가사에 관한 것만 말해."

 

하고 간수가 주의를 하였다.

 

"그럼, 우리 협동조합 재산은 다 어찌하였소"?

 

하고 숭이가 묻는다.

 

"협동조합은 못하리라고 경찰에서 금해서, 출자했던 것은 모두 나누어 가졌지요. 주재소에서 와서 입회를 하고 모두 나누었답니다. 그리고 유치원도 문을 닫고. 유치원은 나 혼자라도 하려면 하겠는데 동네 사람들의 인심이 변해서-그래도 근래에는 동네 부인들이 우리집에 놀러도 오고 의논하러도 와요. 다들 못살게 된다고, 술들만 먹고, 빚들만 지고-하고 예전 생각이 나나 보아요."

 

숭은 가만히 살여울을 생각하고 살여울의 앞날과 조선 농촌의 앞날을 생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