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의 집은 다시 안정이 되었다. 정선은 다시 울지 아니하였다. 모든 일은 혼자의 판단과 의지력으로 해보려고 결심하였다.
아침에 눈을 뜨면 논이나 밭을 어떻게 할 일, 소를 어떻게 먹일 일을 생각하였다. 아침마다 한번씩 들러주는 작은갑에게 혹은 문의하고 혹은 부탁하여 일을 처결하였다. 처음에는 스스로 제 판단과 제 의지력을 의심하였으나 하루 이틀, 한번 두번 경험함으로 점점 파겁(破怯)이 되어서 자신이 생기게 되었다.
마치 과부된 사람이 곧잘 사내답게 집안 처리를 하는 것과 같았다. 게다가 정선이가 받은 전문교육은 이렇게 독립된 생활을 하게 된 때에 큰 힘을 주었다. 정선은 한 달이 다 못해서 가사를 주재하는 데 거리낌이 없이 되었다.
정선은 아침에 일어나면 을란을 일터로 보내고 을란이가 길어다 준 물로 손수 밥을 지었다. 절뚝절뚝하는 다리로 부엌으로 들락날락하는 정선의 행주치마 모양이 보였다.
정선은 방을 치기와 빨래하기도 배웠다. 소를 강변으로 끌고 다니며 풀을 뜯기기도 하고, 썩 좋은 꼴판을 발견할 때에는 이튿날 낫을 들고 나와서 베기도 하였다.
정선의 분결같은 손은 피부가 점점 굳어지고 정선의 흰 낯은 꺼멓게 볕에 그을렀다. 그 모양으로 정선의 정신도 굳어지고 기운차게 되었다.
노동과 피곤은 정선의 입맛을 돋우어서 오래 두고 먹던 소화약의 필요를 없이 하였다. 그리고 베개에 머리를 붙이기만 하면 잠이 들었다.
정선은 새로운 인생을 발견하였다. 그것은 제 마음대로 아무에게도 의지함이 없이 사는 인생이요, 노동과 피곤에서 오는 세월 가는 줄 모르는 인생이었다.
정선의 집 마당에는 빨래가 하얗게 널린다. 그것은 정선이가 빤 것이다. 정선은 풀질을 배우고 밟는 것을 배우고 다리는 것을 배웠다. 적삼 등에 땀이 흐르는 것쯤은 당연한 일이었다.
정선은 화장 제구를 집어치웠다. 볕에 그을러 검은 얼굴에 분을 바를 필요도 없었다. 머리 모양을 낼 필요도 없었다. 그저 든든하게, 그저 검소하게, 정선은 이러한 중에서 새로운 미를 발견하였다.
동네 사람들은 곧 서울로 쫓겨가려니 하던 정선이가 아주 시골 여편네가 다 되어버려서 농사를 짓고, 진일, 궂은 일을 다 몸소 하는 것을 보고는 놀랬다. 그리고 살여울 부인들은 분도 안 바르고 비단옷도 아니 입고 제 손으로 아침 저녁을 짓고 제 손으로 빨래를 하는 정선에게서 자기네와 꼭 같은 여성을 발견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정선의 집에 놀러 와서 마음놓고 이야기를 하였다. 그들은 비로소 정선이가 결코 나쁜 년, 교만한 년, 아니꼬운 년이 아니요, 도리어 마음이 아름답고 인사성 있고 지식 많은 "사람"이요, "여편네"인 것을 발견하여 사랑하고 존경하는 생각을 발견하였다.
살여울 부인네들은, 처음에는 정선을 구경하러 오고 다음에는 사귀러 왔으나 마침내는 정선에게 무엇을 배우고 청하고 의지하러 오게 되었다.
"살여울 모룻집 아이어멈은 참 양반다운 사람이야."
하고 늙은 부인네들이 칭찬하고 먹을 것이 있으면 싸다 주게 되었다.
허숭이가 조선 독립을 목적으로 농민을 선동하여 협동조합과 야학회를 조직하였다는 죄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오년, 백선희가 공범으로 삼년, 작은갑이가 삼년, 맹한갑이가 상해치사,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오년의 징역 언도를 받고 일년 삼 개월의 예심을 치른 후이었다. 네 사람은 일제히 공소권을 포기하고 복역하였다.
피고인 일동은 판결을 받은 날 재판장의 허락으로 약 오 분간 법정에서 공소할 여부 기타를 의논도 하고 이야기도 할 기회를 허락하였다.
그 자리에서 한갑은 숭을 향하여,
"용서해 주게, 내가 지금이야 형이 누구인지를 바로 알았네. 내가 칠년 후에 옥에서 나가는 날이면 내가 남은 목숨을 형에게 바치려네."
하고 숭의 손을 잡으려 하였으나 간수에게 금지를 당하였다.
숭은 말없이 고개를 한번 끄덕여 보였다.
"공소하시려오"?
하고 숭은 선희에게 물었다.
"저는 선생님 하시는 대로 해요."
하고 선희는 초췌한 숭을 보았다.
"나는 공소권을 포기하겠소이다."
"저도 공소 안해요."
하고 선희는 재판장을 바라보았다.
"나도 안해요."
하고 작은갑이는 도로 고개를 숙인다.
"한갑군 자네는"?
하고 숭이가 물었다.
"우리는 죽든지 살든지 형의 뒤를 따를 사람일세."
하고 한갑은 숭의 앞에 허리를 굽혔다.
이리하여 판결은 확정되고 피고들은 간수에게 끌려서 법정을 나섰다. 방청석에 있던 정선은 남편이 웃어보이는 양을 보고 목을 놓아 울었다. 같이 방청석에 갔던 한민교 선생이 정선을 붙들고 법정 밖으로 나왔다. 한 선생의 눈에도 눈물이 있었다.
정선과 한 선생은 숭에게 최후의 면회를 허락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