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숭, 백선희, 맹한갑 등 다섯 명은, 무너미 주재소를 다 저녁때에 떠나서 읍내 본서까지 압송이 되었다. 그들이 무너미를 떠날 때에는 다수의 동민들이 길가에 나와서 전송하였으나 그것이 섭섭하게 여기는 전송인지 또는 단순한 구경인지도 표시되지 아니하였다. 오직 돌모룻집 작은갑이가 비창한 낯으로 얼마를 더 따라오다가 숭이에게,
"가사는 다 믿소. 장례도 믿소."
하는 부탁을 받고 울며 돌아섰다.
한갑과 숭을 다 잃어버린 한갑 어머니는 정신없이 울고만 있었다. 동네에서는 늙은이들이 가끔 들여다 볼 뿐이요, 젊은 축들은 그림자도 얼씬하지 아니하였다.
이튿날, 읍에서 경찰서장이 검사의 자격으로 공의를 데리고 와서 시체를 선희의 유치원에 운반하여다가 해부하고 현장을 검사하고 돌아갔다. 공의는 서장을 향하여 귓속으로, 순이가 죽은 원인은 자궁파열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숭의 집, 선희의 집의 가택수색을 하고 조합문서와 편지 몇 장을 압수해 가지고 갔다.
유가들은 또 한번 모여서 떠들었으나 아무도 장례를 위하여 나서는 이는 없었다.
"서방질하다가 뒈진 년을 장례는 무슨 장례냐"?
하고 비웃는 자도 있었다.
돌모룻집 부자와, 쌍동이 아버지와, 기타 한갑이 친구, 숭을 존경하는 사람 등 몇 사람이 모여서 순의 다 찢긴 시체를 싸서, 밀짚거적에 묶어서 공동묘지에 갖다가 묻었다. 이 날은 아침부터 부슬부슬 비가 왔다.
한갑 어머니와 정선이가 평지가 끝나는 곳까지 따라갔다. 정선은 그 초라한 순의 장례, 맞들리어 홑이불을 덮고 들려가는 순의 시체가 점점 멀어가는 것을 보고 길가에 서서 혼자 울었다. 불쌍한 순을 더욱 불쌍하게 만든 것이 정선이 자신인 것만 같아서 가슴이 아팠다.
"참말 얌전하던 여자, 착하고도 맺혔던 여자, 사랑에 실패한 한을 영원히 품고 가는구나!"
하고 정선은 눈물을 씻으며 자탄하였다.
숭과 선희가 잡혀간 뒤에 유치원은 패쇄를 당하였다. 유치원에 다니던 아이들은 모여서 놀 곳을 잃고 산으로, 들로 흩어져 다니며 장난을 하였다. 어디서든지 유치원 집을 바라보던 아이들은,
"저기서 송장 쨌단다. 골에서 의사가 와서 송장 쨌단다."
"거기, 머리 푼 구신(귀신) 난다드라, 야!"
하고는 소리를 지르고 달아났다.
이 동네에는 흉가가 둘이 생긴 것이었다. 하나는 한갑이의 집이요, 또 하나는 선희의 집, 곧 유치원이었다.
정선이도 유치원을 바라보면, 더구나 새벽이나 황혼에 바라보면 그리 유쾌한 생각은 나지 아니하였다. 마음에 좀 꺼림한 것을 작은갑에게 부탁하여, 유치원에 두었던 피아노와 선희의 세간을 집으로 옮겨오게 하였다. 피아노는 마루에 놓고 선희의 짐은 건넌방에 들여 쌓았다.
남편이 잡혀간 지도 일 주일이 넘었다.
"나는 검사국으로 넘어가오. 살여울에 있기가 어렵거든 서울로 올라가시오. 집 일은 모두 작은갑군에게 물어서 하시오"
하는 엽서가 숭으로부터 왔다.
어느 날, 어느 시에 떠나는 줄만 알면 정거장이라도 가고 싶었으나, 작은갑의 보고에 의하여 한갑을 때린 사람들은 놓여나오고 그 사람들의 말을 듣건대 숭과 선희와 한갑은 어제 아침차로 으로 갔다고 한다.
"서울을 가? 내가 왜 서울을 가."
하고 정선은 엄지손가락을 씹으며 울었다. 정선은 일생에 처음 독립한 판단을 아니하면 아니될 경우를 당하였다. 제 배의 키를 제 손으로 잡지 아니하면 아니될 경우를 당하였다.
정선은 을란을 불렀다.
을란은 정선이가 슬퍼하는 양을 보고 더욱 마음이 비감하여,
"선생님 어떻게 되셨어요"?
하고 물었다.
"검사국으로 가셨단다."
"그럼, 언제나 돌아오셔요"?
"알 수 있니? 그런데 너 어찌하련? 너 나허구 있으련? 서울로 가련? 어려워할 것 없이 네 마음대로 해라."
"전, 선생님 계시는 데 있어요."
하고 을란은 대답하였다. 을란은 근래에 와서는 정선에 대한 반감이 줄고 동정하는 마음이 생겼다. 선생님이라는 것은 정선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여기 있으면 농사를 지어야 된다. 선생님이 하시던 농사를 우리 둘이 지어야 한다. 김도 매고, 거두기도 하고-그것을 네가 할 테냐"?
"허지, 그럼 못해요? 그렇지 않아도 금년부텀은 해보려고 했는데."
하고 을란은 밭과 논에 나가서 다리와 팔을 올려 걷고 김을 매는 것을 상상하였다. 그것은 을란에게는 심히 유쾌한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