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은 앉기 힘들어하는 정선을 안아 앉히었다.
"서울로"?
숭은 아내의 말에 반문하였다.
"그럼 서울로 가요. 아무리 애를 써도 일도 안되고, 동네 사람들이 고마운 줄도 모르는 걸 무엇하러 여기서 고생을 하우? 서울로 갑시다. 가서 다른 일에 그만큼 애를 쓰면 무슨 일은 성공 못하겠수"?
하고 정선은 애원하였다.
"우리가 동네 사람들한테 고맙다는 말을 들으러 여기 온 것은 아니니까. 아니하면 안될 일이니까 하는 게지…. 그런데 여보, 나도 이곳을 떠나기는 떠날 텐데…."
"정말? 그래요, 응! 이깐놈의 데를 떠나요. 오늘 밤차로라두."
"글쎄, 떠나긴 떠날 텐데 말요. 어디를 갈 마음이 있는고 하니 살여울보다 더 흉악한 데를 갈 마음이 있단 말이오."
"살여울보다 더 흉악한 데"?
하고 정선은 눈을 크게 뜬다.
"살여울 사람들은 아직도 배가 불러. 배가 부르니까 아직 덜 깨달았단 말요. 나는 저 평강을 가고 싶소. 왜 경원선을 타고 가느라면 평강, 복계를 지나서 검불랑, 세포가 있지 않소? 그 무인지경 말요. 거기 지금 소야 농장이라는 일본 사람의 큰 농장이 있는데, 거기 농민들이 많이 모여들어서 개간을 한다니 우리도 그리로 갑시다.
가서 우리도 황무지를 한 조각 얻어 가지고 개간을 해봅시다. 그리고 그 불쌍한 농민들에게 우리가 무슨 일을 해 줄 수가 있겠나 알아봅시다. 거기는 아직도 정말, 배가 고픈 줄도 모르는 살여울보다도 할일이 많을 것 같지 않소? 이 살여울은 너무도 경치가 좋고 토지가 비옥하고 배들이 불러. 좀더 부자들한테 빨려서 배가 고파야 정신들을 차릴 모양이오.
또 우리집도, 우리 생활도 너무 고등이구. 우리 이번에는 조선에 제일 가난한 동포가 사는 집에서 제일 가난한 동포가 먹는 밥을 먹어봅시다. 그리고 제일 가난한 동포가 어떻게 하면 넉넉하게 먹고 살아갈 수 있을까 실험해봅시다. 그래서 만일 그 실험이 성공한다면, 그야말로 조선을 구원하는 큰 발명이 아니겠소? 우리 그리합시다.
응, 여기서 벌여 놓았던 것은 다 작은갑군에게 맡기고 우리는 알몸뚱이만 가지고 검불랑으로 갑시다. 검불랑 가는 동포들은 다 알몸뚱이로만 가는 모양이니, 우리도 그이들과 꼭 같은 모양으로 갑시다. 우리에게는 너무도 돈이 많으니깐 가난한 이들이 도무지 믿어 주지를 않는단 말요."
"그럼, 한푼도 없이 가요? 여기 있는 건 다 남 주구"?
하고 정선은 더욱 놀랐다.
"응, 여기 있는 것은 조합 출자금으로 해서 가난한 농민들의 농자 대부의 밑천을 삼고 우리는 몸만 가보잔 말요. 어디 굶어 죽나, 안 죽나 보게."
하고 숭은 자기의 말이 정선에게 대해서 너무나 가혹한 것을 좀 완화해볼 양으로 웃어 보였다.
"난 못해. 그렇게 한푼도 없이는 난 못해."
하고 정선의 놀람과 타격은 숭의 웃음만으로 풀어지기에는 너무도 크고 강하였다.
"그렇게 어떻게 산단 말요? 난 죽으면 죽어도 그것은 못하겠소."
하고 정선은 놀람과 의혹의 혼돈속에서 단단한 결론을 얻어서 힘 있게 숭의 제안을 부인하였다.
숭은 더 말하는 것이 쓸데없음을 깨닫고 입을 다물어버렸다.
둘이 다 한참이나 잠잠히 있을 때에 을란이가 작은갑이를 데리고 왔다. 작은갑이는 논일을 하다가 오는 모양이어서 물에 젖은 괭이를 메고, 옷은 말할 것도 없고, 콧등과 이마에까지 흙이 튀었다. 잠방이를 무릎 위까지 걷어 올리고 맨발에 젖은 짚신을 신었다.
"거, 원, 무슨 일들이람!"
하고 괭이를 내려놓고 정선에게 공손히 인사를 한다.
"나 부르셨소"?
하고 작은갑은 마루에 올라섰다. 나이는 서너 살밖에 아니 틀리지마는, 작은갑은 숭에게 대해서 "허 선생"이라고 부르고 또 경어를 쓴다. 그는 동네 청년 중에 가장 숭의 사업과 인격을 이해하는 사람이다.
"이리 들어오시오."
하고 숭은 일어나 작은갑을 맞았다.
"발이 젖어서…모판을 좀 돌보느라고."
하고 작은갑은 발바닥을 마룻바닥에 문질렀다.
"그냥 들어오셔요."
하고 정선은 작은갑이가 미안히 여기는 것을 늦추려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