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때에 집에 다니러 갔던 숭이가 한갑의 집을 향하고 왔다. 숭은 등성이에서 멀리 바라보고 섰는 정근을 등뒤로 보았다. 그는 한갑의 집에서 일어나는 일을 바라보고 선 것이었다. 어찌하였던지 숭의 세력의 몰락은 자기의 세력의 증장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정근은 이 동네에 온 후로 숭을 찾은 적이 없었다. 혹 길에서 만나게 되더라도 외면하고 다른 데로 피해버린 것이었다.
숭은 정근을 볼 때에 울분한 생각이 폭발하였다. 이 모든 비극은 정근이가 만들어 낸 것을 생각하면 참을 수가 없이 분하였다.
"여보게, 정근이!"
하고 숭은 정신없이 섰는 정근을 불렀다. 정근은 깜짝 놀라 돌아보며 숭을 발견하였다. 정근은 무의식 중에 두어 걸음 뒤로 물러서다가 용기를 수습하여 우뚝 선다.
"자네는 비극을 만들어 놓고 구경을 하고 섰나? 사람을 죽여 놓구 구경을 하고 섰나"?
하고 숭은 한 걸음 정근에게로 가까이 가며 정근을 노려보았다.
"그것은 누가 할 말이야"?
하고 정근은 되살았다. 그의 동그란 눈에는 독기가 품어 있었다.
"비극을 만들기는 누가 만들고, 사람을 죽이기는 누가 죽였는데. 대관절 이 평화롭던 살여울의 평화를 교란해 놓기는 누가 하였는데"?
하고 정근은 도리어 숭에게 대들었다.
"그건 무슨 말인가"?
하고 숭은 정근에게 한 걸음 더 가까이 갔다.
"생각해보게 그려. 자네가 나보다 더 낫게 알 것이 아닌가. 이 모든 비극의 작자인 자네가 그것을 모르고 되려 날더러 물어"?
하고 정근은 냉소하고 동네를 향하고 걸어 내려갔다.
숭은 정근이가 내려가는 뒷모양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정근의 흉중에는 지금 무슨 궤휼과 음모가 있는고 하고 숭은 한숨을 내쉬었다. 자기가 살여울 동네를 위해서 세운 모든 계획은 다 수포로 돌아간 것을 깨달았다.
숭은 성난 소리, 우는 소리가 들려오는 한갑의 집을 이윽히 바라보다가 돌아서서 집으로 왔다.
집에는 정선과 선희가 마주앉아 있었다. 숭은 잠깐 안방을 들여다보고는 건넌방으로 들어갔다. 오늘 안으로 무슨 더욱 큰 일이 생겨오는 것 같아서 도무지 마음이 가라앉지를 아니하였다.
숭은 손으로 이마를 괴고 책상에 기대어 깊은 생각에 잠겼다.
"나는 살여울을 떠나지 아니하면 안된다"
하고 마음속으로 혼자 말하였다.
"떠나면 어디로 가나"?
하고 혼자 물었다.
"떠나면 살여울서 시작한 사업은 누가 하나"?
하고 또 혼자 물었다.
숭은 작은갑이를 생각하였다.
작은갑이는 조합의 서기 일을 보는 청년이었다. 그는 돌모룻집 영감님의 아들이다. 그 아버지와 같이 말이 없고, 침착하고 그리고 동네 일을 제 일과 같이 정성으로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좀 수완이 부족하지마는 지키는 힘과 믿음으로 동네에서 첫째였다. 한갑은 수완이 있었으나 제어하기 어려운 열정과 야수성이 있었다. 작은갑이는 그것이 없었다.
"을란아!"
하고 숭은 을란이(유월이)를 불렀다.
"너 줄아웃집 작은갑씨 오시라구, 얼른 좀 오시라구. 만일 안 계시거든 어디 가셨는지 물어보아서 일터에까지 가서라도 얼른 좀 오시라구. 급한 일이라구 그래라."
하고 일렀다.
"네에."
하고 을란은, 아직도 변하지 아니한 순 서울 말씨로 대답하고 머리꼬리를 흔들며 나갔다.
"을란이는 어찌하누"?
하고 숭은 을란의 모양을 보며 생각하였다.
"선희는 어찌하누"?
하고 숭은 이어서 생각하였다.
숭은 제게 관련된 사람이 모두 불행한 사람인 것을 생각하고, 저 자신도 불행한 사람인 것을 생각하고 한숨을 쉬었다.
"작은갑씨는 왜 불르우"?
하는 소리에 숭이 놀래어 돌아보니 정선이가 등뒤에 있었다. 그도 남편의 심상지 아니한 태도와 말에 염려가 되어서 안방으로부터 건너온 것이었다. 숭은 깊은 근심에 아내가 오는 것도 알지 못하였다.
"아니, 조합에 대해서 좀 할 말이 있어서…."
하고 숭은 고무다리를 치고 겨우 몸의 평형을 안보하고 섰는 아내의 가엾은 모양을 보고 위로하는 듯이 빙그레 웃었다.
"우리 서울로 가."
하고 정선은 숭의 곁에 앉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