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 네가 무슨 죄가 있니. 그녀석이 죽일 놈이 되어서 정근 이놈의 말을 듣고 그러지."
하고 한갑 어머니는 힘있게 대답하였다.
"어머니만 그렇게 알아주시면 저는 죽어도 한이 없어요."
하고 순은 느껴 울었다. 순은 이제야 의식을 완전히 회복하여 전후사를 헤아린 모양이었다.
"죽기는 왜? 네가 죽으면 이 에미는 어떡하게. 안 죽는다, 응."
하고 한갑 어머니는 있는 웅변을 다하여 죽어가는 며느리를 위로하는 셈이었다. 순은 다시 말이 없었다. 얼굴에 흘러내리는 눈물만이 희미한 불빛에 번쩍거렸다.
선희는 순이가 다 말하지 못하는 한없는 생각과 슬픔이 알아지는 것 같았다. 그래서 가슴이 아팠다.
"허 선생님!"
하고 얼마 있다가 순은 다시 눈을 뜨고 불렀다.
"허 선생 읍내에 가셨수."
하고 선희는 순의 얼굴에 입을 가까이 대고 앓는 동생에게 대답하는 모양으로 대답하였다.
"왜"?
순은 다시 물었다.
"의사 부르러."
하고 선희는 손바닥으로 순의 눈물을 씻었다.
"이 밤중에"?
"……"
"난 살구 싶지 않어요."
하고 순은 선희의 손을 잡았다.
"왜 그런 소리를 허우"?
하고 선희는 순의 손을 잡았다.
"나 죽기 전에 허 선생님이 돌아오실까."
하고 또 한번 순의 눈에서 새 눈물이 흘렀다.
"곧 오실걸. 오실 때에는 자동차로 오실걸."
하며 선희는 순의 맥을 만져보았다. 맥은 알아볼 수 없으리만큼 약하고 입술은 점점 희어갔다.
순은 다시 눈을 뜨며,
"선생님."
하고 선희를 부른다.
"왜 그러우. 마음을 편안히 가지지. 그렇게 여러 생각을 마시오."
하고 선희는 순의 어깨를 만진다.
"자꾸 정신이 희미해가요. 이 정신이 남아 있는 동안에 할 말을 다 해두고 싶은데, 자꾸 정신이 흐릿해 가는걸."
하고 순은 말을 계속하기가 힘이 들어한다.
"왜 그런 말을 하우? 피가 좀 빠지면 빈혈이 되어서 그렇지만 출혈만 그치면 곧 회복된다우. 피란 얼른 생기는 것이어든. 아무 염려 말어요."
"내가 이 아이를 낳지 아니하면 무엇으로 이 누명을 벗어요? 아이를 꼭 낳아야만 누명을 벗겠는데. 죽더라도 아이를 낳아 놓고 죽어야겠는데. 뱃속의 어린애는 벌써 죽었는걸. 선생님, 이 누명을 어떻게 씻습니까. 내 누명도 누명이지마는 친부모보다도 오빠보다도 더 은혜가 많으신 선생님의- 허 선생님의 명예를 어떻게 합니까? 아무 죄도 없이."
하고 또 눈물을 흘린다.
"나 물!"
하고 옆방에서 한갑의 소리가 들린다.
"나 물 주어. 어디 갔어"?
하고 소리를 지른다.
한갑은 한 시간쯤 자고 나서 옆에 아내가 누운 줄만 알고 있는 모양이다.
"이놈아, 정신이 들었느냐."
하고 한갑 어머니는 다 찌그러진 장지를 열어 젖히며,
"이놈아, 글쎄 아무리 술을 처먹었기로 이게 무슨 짓이냐. 눈깔이 있거든 이 모양을 좀 보아라. 좀 보아!"
하고 아들의 다리를 쥐어뜯는다.
"왜? 왜? 왜"?
하고 한갑은 잘 떠지지 않는 눈을 억지로 뜨며 벌떡 일어나 앉아 아랫목을 내려다본다.
이마를 싸매고 드러누운 아내의 모양을 보고는 한갑은 희미하게 남은 기억을 주워모아 보았다.
문을 열어 주는 아내의 머리채를 끌어 힘껏 둘러치던 생각이 나고, 읍내에서 정근이가 순이와 숭이와의 관계를 차마 들을 수 없는 말로 말하던 것이 생각나고, 순이를 죽이고 숭이를 죽인다고 이 십리길을 허둥지둥 나오던 일이 생각난다. 그리고 숭의 집으로 뛰어 올라갔던 일도 생각나나 자세한 생각은 나지 아니하고, 읍내에서 정근에게 끌려 어떤 통통한 창기와 희롱하던 생각이 났다.
그러나 모든것이 안개속에 있었다.
천지가 모두 뿌옇다. 아무리 눈을 크게 뜨려 하여도 도무지 분명히 보이지 아니하는 모양으로 아무리 분명히 생각하려 하여도 도무지 분명히 생각혀지지 아니하였다.
"어떻게 됐소"?
하고 한갑은 얼빠진 사람 모양으로 묻는다.
"어떻게 된 게 무에냐. 저기 보아라. 저렇게 모두 이마가 터지고 하혈이 되구-아이가 떨어지면 어떻게 한단 말이냐. 이 망할 자식아."
하고 한갑 어머니는 울며 아들의 어깨를 때린다.
그리고도 아들이 물 달라던 말을 생각하고 부엌으로 내려가서 사발에 물 한 그릇을 떠 가지고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