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안 듣는 데 미가 있다나. 더구나 들을 듯 들을 듯 안 듣는 데는 사내들이 죽는다고. 이건 사실인가봐. 기생들도 이 수단을 쓴대요. 나는 그래서 남의 말 안 듣는 것은 아니지, 하하하하. 내야 나를 해치려는 사람들 틈에서만 살았으니깐 자연 남의 말을 안 듣게 된 게지. 남의 말을 들으면 제게 해로울 것만 같으니깐. 그렇지만 순례 모양으로 부모의 사랑속에 자라난 사람이야 남의 말을 안 듣는 연습이 없단 말야. 안 그렇습니까? 남의 말 안 듣는 것이 자위책이거든요."

 

하고 숭을 바라본다.

 

숭은 그렇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려 보았다.

 

"남의 말 안 듣고 안 믿는 공부는 그동안 기생 노릇에, 이를테면 대학을 마친 심이야."

 

하고 선희는 말을 잇는다.

 

"기생으로 나서면 손님이란 손님이 다 내게 호의를 가지는 사람이구, 다 나를 위해서는 목숨이라도 바칠 것 같은 사람들이거든. 말을 들으면 말야. 그러니 그 말을 다 믿고 다 듣다가야 큰 코가 백이 있기로 배겨나겠어요. 그러니깐 오냐 나는 네 말을 안 믿는다, 나는 네 말을 안 듣는다, 하고 속으로 선언을 해놓지요. 그리고는 네네, 그렇습니다. 아이구 고마우셔라, 그럼요, 이런 대답을 하거든. 그것이 영업이란 말야. 안 그러냐? 그렇지 않습니까, 선생님? 호호호호."

 

"허지만 이렇게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죽기보다 어려운 일이야요. 아무의 말도 믿지 아니하고 아무의 말도 듣지 아니하고, 그저 의심만 하고 뿌리치기만 하는 생활은 참 못해 먹을 것입니다. 참 그렇다, 정선아! 고양이라도 괜찮고 강아지라도 괜찮으니 누구 하나 안심하고 믿을 사람이 있고 싶다.

 

그렇지 아니하면 마치 광야에 혼자 사는 것 같거든. 곁에 사람이 백만 명이 있기로 믿지 못하는 사람이면 없으나 다름없지 않습니까. 믿지 못하는 사람이면 원수니깐 도리어 적국에 잡혀간 포로나 마찬가지지요. 안 그렇습니까? 남의 말 안 듣는 것을 자랑으로 아는 것도 잠시 잠깐입니다. 참 못 살겠어요. 그래서 기생을 그만두는 동시에 남의 말을 듣기로 작정을 했습니다. 웃지 말아라 정선아. 너같이 팔자 좋은 아이야 나같은 계집애 심리를 알겠니"?

 

"말을 듣기로 했다니, 뉘 말을 듣기로 했니"?

 

하고 정선이가 묻는다.

 

"글쎄, 허 선생 말씀을 듣기로 작정을 했다. 허 선생 말씀이면 듣기도 하고 믿기도 하기로. 그렇지마는 허 선생은 정선이 남편이시니깐 네가 동의를 해야겠지. 너 반대 안하지"?

 

하고 선희는 정선을 바라본다.

 

"내가 왜 반대를 해? 다 자유지."

 

하고 정선은 승낙하는 듯하면서도 말에 바늘을 품겼다.

 

"제가 지금 시골로 가면 농촌에서 무엇이든지 할일이 있겠습니까. 유치원 보모든지, 소학교 교사든지 기타 무엇이든지 말씀이야요. 저는 기생 노릇해서 번 돈이 한 오천 원 됩니다. 그러니깐 월급은 안 받아도 괜찮아요. 다만 이제는 소원이 "쓸데 있는 일"을 해보는 것입니다. 노리개 생활은 이제는 싫어요. 쓸데 있는 사람이 되어서 쓸데 있는 일을 좀 해보고 싶어요.

 

그렇다고 농사를 지을 줄은 모르고, 방직공장 여직공도 좋지마는 역시 아직도 야심이 남았어요. 제 주제에 누구를 가르친다는 것이 염치없는 일이지만두, 가갸거겨, 하나 둘 셋이나 가르치는 것이야 어떨라고요. 만일 그것을 할 수가 없다고 하시면 방직 직공으로 가지요. 그것도 쓸데 있는 일인 것은 마찬가지니까요.

 

네, 선생님, 제가 그런 일을 할 수가 있을까요? 극단의 무용한 사람으로서 속속들이 유용한 사람이 한번 되어보고 싶어요. 그렇게 되도록 저를 좀 도와주세요. 성경의 말씀과 마찬가지로 잃어버렸던 양이 목자에게 돌아온 것으로 보아주세요."

 

하는 선희의 음성은 흥분 상태로부터 벗어나서 침울에 가까운 상태로 들어갔다.

 

선희의 제가 하려고 별렀던 말을 대강 다 한 것을 발견하고는 어째 텅텅 비인 것 같음을 깨달았다. 또 제 약점을, 제 부끄러움을 사람들의 웃음거리의 재료로 제공하지나 아니하였나 하는 싱거움까지도 깨달았다. 도무지 진정을 토설하지 않기로 작정한 생활을 해오던 선희가 벼르고 별러서 한바탕 진정을 토설하고 나니, 마치 아이를 낳고 난 부인과 같이 허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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