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선은 선희의 속마음을 꿰뚫어보려는 눈으로 싸늘한 독이 품긴 눈살을 선희의 일동 일정에 던졌다. 그리고 선희가 숭에게 마음을 두어 숭을 빼앗아가려는 것이나 아닌가 하고 마음에 자못 불쾌하였다. 그렇지 아니하면 무슨 까닭에 갑자기 기생을 그만두고 정선을 따라오려는 것일까.

 

"무얼 날 따라오는 게야"?

 

하고 정선은 빈정댔다. 그러나,

 

"네가 내 남편을 따라오려는 것 아니냐"?

 

이런 말은 정선의 입에서 나오지 아니하였다.

 

선희는 잠깐 정선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정선의 얼굴에서 유쾌한 웃음을 찾아 보고는 안심하고,

 

"저는 어려서부터 말 안 듣는 계집애로 유명했답니다. 아버지, 어머니 살아 계실 때에도 영 이르는 말씀은 안 들었지요. 때리면 얻어맞고, 울고, 밥을 굶을지언정 영 말은 안 들었답니다. 왜 그랬는지 내 모르지요. 학교에 가기 시작한 뒤에도 말을 잘 안 들었어요.

 

제 생각에는 어른들이 시키는 말씀이 다 옳지 않아 보인단 말야요. 어른의 권력으로, 선생님의 권위로 내려누르시지마는 옳지 않은 것이 옳게는 안 보이거든요. 옳게 안 보이는 것을 복종하기는 싫거든요. 안 그러냐 얘, 너도 내가 선생님한테 벌 받는 것을 여러번 보았지, 왜"?

 

하고 선희는 정선의 동의를 구할 겸 눈치를 떠본다.

 

"그럼, 고년 작두로 안 찍힐 년이라구. 불에 태워두 안 타질 년이라구 하하하하, 그 돌배라는 선생이 안 그랬니, 왜? 선희 널 보구."

 

하고 정선은 유쾌하게 깔깔대고 웃는다.

 

숭은 정선이가 유쾌하게 생각하는 것이 기뻤다. 선희도 그러하였다. 정선은 선희의 태도와 말이, 그가 단순히 사내를 따르려는 계집이 아니요, 사내와 계집을 초월한 사람의 위신을 찾았음을 느끼고 안심하게 된 것이었다.

 

"그렇게 저는 누구 말 안 듣는 계집애로 자라났단 말씀야요. 그러다가 아버지, 어머니 다 돌아가셔서, 삼촌 집에 가서도 말 안 듣는 버릇은 놓지 못했답니다. 더군다나 삼촌이라는 이가 내게 호의를 가진 사람이 아닌 줄을 안 다음에야 내가 왜 그 말을 들어요? 심사로라도 안 듣지.

 

삼촌은 웬일인지 저를 미워하셨답니다. 작은어머니라는 이는 더하고요. 제게 제일 가까운 사람이 외조모와 이모들이지마는, 삼촌이 제가 외가에 가는 것은 대기거든요. 또 외가가 서울을 떠난 것도 한 이유는 되지만두, 삼촌의 목표는 제게 있은 것은 아니지요. 조카딸년이야 어찌 되었든지, 아버지 두고 가신 재산만 가지면 그만이란 말씀야요.

 

제가 고등과를 졸업한 때에-열여덟 살 적이지? 삼촌은 저를 어느 부랑자의 후실로 가라고 야단을 하셨지요. 저는 전문과에 간다고 떼를 쓰고. 전문과에 가? 전문과엔 무엇하러, 전문과에 가면 학비를 안 줄걸. 이러시고 삼촌은 야단이시지요. 삼촌도 나만 못지않게 뉘 말 안 듣는 양반이시거든요. 그래 숙질간에 대충돌이 안 났습니까. 죽일 년 살릴 년이지요.

 

그러니 삼촌하구 열여덟 살 된 계집애하구 싸우자니 적수가 되어요? 그래 최후에 제가 그럼 그까짓 재산 다 삼촌 가지우, 난 전문과만 졸업하도록 학비만 주시구. 이런 조건으로 타협이 되었지요. 재산요? 재산이라야 몇푼어치 되나요. 양주 논, 고양 논, 시흥 논과 산과 다 해야 한 육칠만 원어치 될까. 그저 한 오백 석 하지요.

 

뒤에 생각하니깐 아깝기도 하지마는, 한번 한 말을 어찌 할 수도 없고, 그래 해달라는 대로 다 도장을 찍어주었지요. 옜소, 옜소, 다 가져가우 하고. 그러고 보니 어떻게 됩니까. 전문과를 졸업하고 나는 날, 저는 쇠천 한푼 남은 것 없지요. 그렇다구 구질구질하게 삼촌더러 먹여달랄 수도 없구요. 그래서 졸업식 한 이튿날 저는 삼촌의 집에서 뛰어나왔지요."

 

하고는 선희는,

 

"제가 이런 말은 왜 합니까. 뉘 말 안 듣는다는 말 하다가 어느새에 신세 타령이 나왔네. 아이 부끄러워."

 

하고 손으로 눈을 가린다.

 

"응. 그래서 네 재산을 모두 네 삼촌한테 빼앗기고 말았구나"?

 

하고 정선은 동정하는 듯이,

 

"난 또 그런 줄까지는 몰랐어. 너 어디 나보고 그런 말 했니"?

 

"그런 말을 왜 하니? 넌 부잣집 작은아씨 아니야. 내가 알거지가 되었다면 너한테 천대받게."

 

"그러기로 설마 내가 너를."

 

하고 정선이가 소리를 내어 웃는다.

 

"암, 그렇지. 내가 기생이 되었다고 정선이가 나 찾아오는 것을 지긋지긋해하지 않어"?

 

하고 선희가 턱으로 정선을 가리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