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은 마치 심판을 기다리는 죄인 모양으로 우두커니 옆방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선희가 올 때에 일어날 불쾌한 한 장면을 그려보았다. 그러나 당할 일은 당할 일이었다. 비가 되거나 우박이 되거나 겪을 일은 겪을 일이다. 다만 정선의 병에 해롭지 않기만 바랄 뿐이었다.
정선은 자는 체를 하고 있으면서 선희에게 대하여 할 행동을 생각하였다. 처음에는 분하기만 하였으나 선희가 언제까지고 가만히 서 있는 것을 보고는 분한 마음이 좀 풀리고 동정하는 마음이 생겼다. 오는 길로 남편을 찾지 아니하고 저를 찾아서 언제까지든지 (정선의 생각에는 반 시간이나 된 것 같았다) 제가 눈을 뜨기를 기다리고 섰는 것이 선희가 제게 대한 성의인 것으로 해석하였다. 그래서 정선은 아무쪼록 선희에게 대하여 호감을 가져볼 양으로 학생 적에 저와 선희와 의좋게 지내던 것을 생각하였다.
이 모양으로 마음을 준비해 가지고 정선은 자다가 깨는 모양으로 가볍게 기지개를 켜면서 눈을 떴다.
"정선이."
하고 선희는 눈을 뜨는 정선의 가슴 위에 엎더지는 듯이 몸을 던지며 제 뺨을 정선의 뺨에 비비고 최후에 입을 맞추었다. 이것은 두 사람이 동성 연애 비슷한 것을 하면서 하던 버릇이었다. 그리고 선희는 코끝과 코끝이 서로 마주 닿을 만한 거리에서 정선의 눈을 들여다보며,
"네가 살아났구나. 네가 살아났어!"
하고 또 한번 뺨을 비비고 입을 맞추었다. 마치 어머니가 어린 딸에게 하는 모양으로,
"그래, 죽지 못하고 살아났단다."
하는 정선도 선희의 열정적인 포옹에 감격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왜 그런 소리를 하니"?
하는 선희는 그제야 정선에게 물러나서 곁에 있는 교의에 앉으며,
"죽기는 왜 죽어? 살아야지. 나는 우연히 미스터 허와 한차를 탔다가 글쎄, 수색 정거장을 조금 지나서 차가 급작스러이 정거를 하지 않겠니? 그때에 미스터 허는 아마 마음에 무엇이 알렸나봐. 벌써 무슨 일이 난 것을 다 아는 듯이 차에서 뛰어내린단 말이다. 눈이 펑펑 쏟아지는데. 그러자 사람들이 뛰어오면서 레끼시(치어 죽음)라고, 웬 젊은 여자가 레끼시를 하였다고 그리겠지, 그래 웬 여자라는 말을 들으니깐 나도 가슴이 설렌단 말야. 남자라고 하는 것보다 다르더라, 역시 여자에게는 여자가 가까운가봐…."
"서로 미워하기도 여자끼리가 제일이고."
하고 정선은 빙그레 웃었다.
"그래. 그래 가보니깐-너 그때 이야기 미스터 허한테 다 들었니"?
하고 선희는 말을 끊고 묻는다.
"그 뚱딴지가 무슨 말을 하니? 또 내가 무에라고 그걸 물어보아"?
하고 정선은 선희의 보고에 참으로 흥미를 느꼈다.
"아, 그래."
하고 선희는 말할 이유를 찾은 것을 만족하게 여기며 말을 계속한다.
"아, 그래 가까이 가보니까-아주 가까이 가게는 아니하지, 길을 막아요-아 그래, 가만히 바라보니깐 기관차 이맛불빛에 웬 젊은 여자가 피투성이가 되어서 눈이 쌓인 철로길에 가로 누워 있단 말이야, 칠피 구두가 불빛에 반짝반짝하고. 그것을 보니까, 나도 저렇게 죽을 몸이 아닌가 하고 마음이 슬퍼지더구나.
그러기로 그것이 정선일 줄이야 꿈엔들 생각하였을 리가 있나. 그런데 말야. 그 시체-우리야 시첸 줄만 알았지. 살았으리라고야 생각할 수가 있나. 그래, 그 시체를 맞들고 차에 실으려고 앞으로 지나가는데 미스터 허가 깜짝 놀라서, 아이구 정선이! 하고 시체를-그러니깐 너지, 정선이지-붙든단 말야. 그래서 보니깐 정선이 아니야. 얼굴이 반이나 피에 젖고, 치마가 모두 아이구, 그 말을 어떻게 다 하니"?
하고 선희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린다.
선희가 우는 것을 보고 정선이도 눈물을 흘렸다. 눈물은 두 사람의 마음에 걸렸던 모든 깨끗지 못한 관념과 감정을 녹여버렸다.
"그래서."
하고 선희는 눈물을 흘린 것이 부끄러웠다는 것같이 일부러 소리를 내어 웃으며 손수건을 두 손가락 끝에 감아가지고 안경 밑으로 눈물을 씻는다.
"그래서, 미스터 허가 차장과 교섭을 해서 너를 일등 침대에다 태우고 다른 차간으로 돌아다니면서 의사 하나를 불러왔지요. 모르지, 정말인지 아닌지, 제가 의사라니깐 아니? 그래서 네가 여기를 오게 되고 나도 여기까지 따라와서 하루를 묵어서 갔단다. 그런 건데 말야. 세상에서들은 무어라고 하는고 하니!"
하고 선희가 새로운 화제를 꺼내려 할 적에 숭이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오셨어요"?
하는 것이 숭의 인사.
"부인 병구완 하시기에 얼마나 곤하셔요? 그래도 이렇게 나았으니깐 다행하시지."
하고 선희는 숭과 정선을 번갈아서 본다.
"낫기는 무어가 나았어? 다리 하나가 없어졌는데 나았어"?
하고 정선에게 불쾌한 빛이 없음을 보고 숭은 마음을 놓았다. 숭은 기생 모양을 버리고 보통 여학생 모양을 차린 선희의 모양을 호기심으로 바라보았다. 그 모양에서 기생의 흔적이 어디 남았는지를 찾기가 어려웠다. 이맛전과 눈썹까지도 예사로왔다. 숭은 이것이 산월인가를 의심할 만하였다. 그렇다고 예전 정선의 집에 놀러다닐 때의 선희도 아니었다.
"왜 그렇게 보세요? 어디 기생 냄새가 나는가 하고 그러세요"?
하고 선희는 두 손으로 낯을 가리고 수삽한 빛을 보인다. 도무지 기생의 흔적이 없었다.
"정선이는 내가 기생으로 차린 것을 본 일이 없지? 기생 스타일에도 일종의 미가 있다. 그것이 아마 조선이 가진 아름다운 것 중의 하나일는지 몰라. 그 몸가짐, 걸음걸이, 그것도 다 공부가 있어야 되어요.-아이, 내가 무어라고 이런 쓸데없는 소리를 하고 있어"?
하고 선희는 정선의 이불과 베개를 바로잡아주고 나서,
"아이 참, 여기 앉으세요."
하고 선희는 섰는 숭에게 교의를 권한다. 이 방에 교의는 하나밖에 없었다.
"앉으시오, 나는 여기 앉지요."
하고 숭은 아내의 침대의 발치에 걸터앉는다.
"글쎄, 어째 기생이 됐어"?
하고 정선은 억지로 불쾌한 생각을 누르면서 물었다. 그것은 남편이 기생 산월의 집에서 잤다는 것이었다.
"기생 됐던 말은 해서 무얼 해"?
하고 선희는 다시 교의에 앉으며 숭을 향하여,
"저 기생 그만두었답니다. 여기서 올라간 날로 폐업하였어요. 그래 지금은 기생 아닙니다."
하고 다음에는 정선을 향하여,
"나 기생 그만두었다. 이제부터는 어느 시골 유치원 보모 노릇이나 하고 싶어. 그리고 야학 같은 거 가르쳐도 좋고."
하고는 또 숭을 향하여,
"정말입니다. 저 어디 갈 데 하나 구해주세요. 살여울은 유치원 없습니까? 정선이 살여울 안 가"?
"글쎄."
하고 정선은 마음에 없는 대답을 하였다.
"정선아, 난 너 가는 데로 갈 테야. 너 따라다녀도 괜찮지"?
선희는 퍽 흥분하여 허둥지둥하는 빛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