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월은 실컷 웃고 나서,

 

"약주 잡수세요. 많이 말고, 꼭 석 잔만 잡수세요."

 

하고 산월은 잔을 들어 숭을 주며,

 

"한 잔 잡수셔야 제가 할말을 하지, 그렇게 점잖게 하시면 무서워요. 자, 잡수세요."

 

하고 권한다.

 

"술은 안 먹을랍니다."

 

하고 숭은 술잔을 받아 한편으로 밀어놓으며,

 

"나는 살여울 사람들더러 술 먹지 말라고 권하는 처지에 있는 사람이야요. 술은 아니 먹더라도 하시는 말씀은 다 듣지요."

 

하고 준절한 거절을 눅이기 위하여 빙긋 웃어 보인다.

 

"한 잔이야 뭐. 권하던 제가 부끄럽지요."

 

하고 산월이가 다시 잔을 잡으려는 것을 숭은 손을 들어 산월의 팔을 막으며,

 

"아니요! 권하시지 마세요. 내가 여러번 호의를 거절하기는 참 거북한 일이니, 내게 호의를 가지시거든 나를 거북하게 마시오."

 

하고 술잔을 들어서 산월의 손이 닿지 아니할 곳에다 놓는다.

 

산월은 잠깐 머쓱하였으나 곧 평상의 기분을 회복해가지고,

 

"제가 어떻게 이 차를 탔는지 아세요"?

 

하는 것은 조금도 농담이 아니었다.

 

"……"

 

숭은 대답할 바를 몰랐다.

 

"아이구 벌써 수색이지"?

 

하고 밖을 내다본다. 차는 정거하였다. 과연 "스이쇼꾸"하는 역부의 소리가 들렸다.

 

"수색이면 어떤가, 나는 영감 가시는 정거장까지라도 따라갈걸."

 

하고 산월은,

 

"오늘 저녁에 어떤 손님에게 부름을 받았지요. 그 손님이라는 이는 이름을 말씀하면 아마 아시겠지마는, 이름은 말씀할 필요가 없구요-그 손님이 한 오륙 일 연해서 나를 불러주셨지요. 그러자니깐 돈도 꽤 많이 쓰고요. 그리고는 자꾸 우리집에를 온다는 것을 별의별 핑계를 다 해서 모면했답니다.

 

내가 기생노릇은 하지마는 내 집에 남자가 와서 자리에 누운 이는 선생님밖에는 없으십니다. 빌리이브 미(나를 믿으세요). 내일 일은 모르지요. 그러나 오늘까지는 그렇게 해왔어요. 그런데 말야요. 그 손님이 오늘은 꼭 어디를 같이 가자고 조른단 말씀야요.

 

배천 온천을 가자는 둥, 평양을 가자는 둥, 오룡배를 가자는 둥, 내가 하르빈 구경을 했으면 했더니 그럼 하르빈을 가자는 둥, 만리장성을 보았으면 했더니 그러면 산해관 열차로 두루 돌아 구경을 하자는 둥, 아주 열심이야요. 나이는 한 오십 된 인데, 나이야 말할 것도 없지만, 그러는 것을 겨우 달래서 요다음 기회로 미루고 정거장까지 전송을 나왔지요. 했더니 이거를 주는구려."

 

하고 왼손 무명지에 번쩍번쩍하는 금강석 반지를 숭에게 보이며,

 

"이것이 엥게이지먼트 링(약혼반지)이라고요. 하하하하. 그리고 제가 먼저 가서 좋은 데를 자리를 잡고 오라고 전보를 하거든 곧 양복을 지어 입고 오라고 이것을 또 주겠지요. 참, 난 아직 그것이 무엇인지도 안 보았어."

 

하고 핸드백에서 양봉투 하나를 꺼낸다. 그 봉투는 여관의 용지였다.

 

겉봉에는,

 

"白山月君"

 

이라고 썼다. 글씨도 상당하다.

 

산월은 그 봉투를 떼었다. 거기서는 소절수 한 장이 나왔다.

 

"金 壹千圓也"

 

라고 액면에 씌어 있다. 그리고,

 

"金"라고 서명이 있고, 네모난 도장이 찍혀 있다. 이름자는 산월이가 얼른 손으로 가리었다.

산월은 그 소절수를 보고 혀끝을 한번 내밀더니 그리 중대한 일이 아니라는 듯이 그것을 접어 봉투에 넣어서 휴지 모양으로 그냥 테이블 위에 밀어놓고 다시 웃으면서,

 

"그래 플랫포옴에서 서서 차 떠나기를 기다리고 있느라니까, 웬 계집애, 선생님을 따라오던 계집애가 눈에 뜨인단 말씀이지요. 그래 보니깐 허 선생님이란 말씀이야요. 그러니 그 손님을 내버리고 따라갈 수도 없고, 눈으로만 혹시 전송을 나오셨나, 차를 타시나 하고 그것만 바라보았어요.

 

했더니 차를 타신단 말씀야요. 일등 차에서 선생님 타시던 찻간까지가 한참 아냐요? 하마터면 잃어버릴 뻔했어요. 그저 모자 안 쓰신 양반하고 분홍 치마 입은 색시하고만 잃어버리지 아니하려고 애를 썼습니다그려. 그랬더니 그 손님이 어디를 그쪽만 보느냐 그러겠지요. 아냐요, 사람 구경해요, 그랬지요.

 

그래 퍽 섭섭해하던걸요. 그러자 선생님이 차를 타시는 것을 보았길래 나도 따라 타리라 하고 결심을 하고서 그 손님 비위를 잘 맞춰주고는 차가 떠나기를 기다려서 뛰어올랐습니다. 역부가 야단을 하지마는 이래.도 나도 테니스도 하고 바스키트볼도 한 솜씨랍니다. 이렇게 제가 영감을-아니 선생님을 따라왔습니다."

 

하고 추연한 기색을 보이며 휘유 한숨을 내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