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은 윤 참판을 보고 이혼 문제도 말하지 아니하고 정선의 간음 문제도 말하지 아니하였다. 다만 저는 농촌에서 농민과 같은 가난한 생활을 하는 것이 소원이니 받은 재산을 다 돌려 드린다고 하였을 뿐이었다. 그러나 숭은 정선에게 이러한 자세한 말을 할 여유가 없었다. 그는 정선이라는 여자의 마음에 선악을 판단하는 능력이 있는가를 의심하지 아니할 수가 없었다.

 

숭은 전화를 떼어 들고 택시를 불렀다. 이 자리에 더 머물러 있을 필요를 보지 못한 것이었다.

 

정선은 거의 본정신을 잃었다 하리만큼 숭을 향하여 온가지 욕설과 저주를 퍼부었다. 처음에는 못 가리라고 주장하였으나 나중에는 어서 나가라고 호령하였다. 처음에는 숭의 짐을 들어 문 밖에 내어 놓았으나 나중에는 모두 다 제 것이니 몸만 나가라고 소리를 질렀다.

 

숭은 마침내 외투를 빼앗기고 양복저고리를 빼앗기고 조끼를 찢기우고 짐도 하나도 들지 아니하고 하인들의 조소속에 이 집 대문을 나섰다. 택시에 올라앉은 때에 유월이가 양복저고리와 외투를 몰래 집어다 주었다. 그것은 숭이가 집에서 나온 뒤에 정선이가,

 

"이 더러운 놈이 입던 옷!"

 

하고 마당으로 집어 내어 던지는 것을 유월이가 집어 가지고 따라 나온 것이었다.

 

"오, 고맙다."

 

하고 숭은 그 옷을 받아 입고 유월의 머리를 어루만져 주었다.

 

"자 경성역으로."

 

하고 숭은 운전수에게 명하였다. 모우터가 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영감마님, 저도 데리고 가 주세요. 저도 따라 가요."

 

하고 유월이가 자동차 창을 두드리면서 불렀다.

 

숭은 몇 번 거절하였으나 마침내 문을 열고,

 

"어디를 간단 말이냐."

 

하고 물었다.

 

"저는 영감마님 따라갈 테야요. 무슨 일이든지 할 테니 저를 데리고 가세요."

 

하고 찻속으로 기어 들어왔다.

 

"가자."

 

하고 숭은 곁에 자리를 내어 유월이를 앉혔다. 안으로부터는 정선의 울음섞인 성낸 소리가 들렸다.

 

차는 떠났다. 요란한 모우터 소리를 내고 차가 떠나서 대한문을 향하고 달릴 때에 숭은 떨어진 칼라를 바로잡고 머리에 모자가 없는 것을 생각하였다. 그리고 앞에 앉은 운전수가 부끄러웠다.

 

정거장에 나오니 차 시간은 아직 한 시간이나 넘어 남았다. 숭은 유월이를 데리고 식당에 올라가 한 구석의 병풍 뒤에 몸을 숨기고 앉았다.

 

"유월아, 너는 집으로 들어가거라."

 

하고 숭은 감히 앉지 못하고 곁에 서 있는 유월이를 돌아보았다.

 

"싫어요, 전 영감마님 따라가요."

 

하고 유월이는 몸을 한번 흔들고 치마 고리를 씹었다. 분홍 치마 노랑 저고리, 흰 행주치마에 자주 댕기를 늘인 순 조선식 계집애 복색이 식당에 앉은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유월은 열 여섯 살로는 퍽 졸자란 편이나 체격은 색시 꼴이 났다.

 

"네가 시골 가서 무얼 해"?

 

하고 숭은 엄숙하게 물었다.

 

"그래도 가요. 무엇이나 하라시는 대로 하지요."

 

하는 유월의 대답에는 결심의 굳음이 있었다.

 

밤 열시 사십분에 봉천을 향하는 열차는 눈이 퍼붓는 속을 헤치고 경성역을 떠났다.

 

삼등실은 한 걸상에 셋씩이나 앉고도 서 있는 사람이 많도록 좁았다. 누워서 자는 체하는 사람과 짐을 올려 놓고 기대고 앉은 사람이 있는 것은 늘 보는 일이다. 조선 사람보다 일본 사람, 무교육한 이보다 교육 있어 보이는 이가 많은 것도 어디서나 보는 일이었다.

 

숭은 간신히 한 자리를 얻어 유월이를 앉히고 저는 자리 넓은 곳을 찾느라고 이 찻간에서 저 찻간으로 여행을 하였다. 그러나 어디를 가도 앉을 만한 곳이 없었다.

 

숭은 좌석의 간막이에 기대어 무심코 다리를 쉬고 있었다.

 

이 때에 등 뒤에서,

 

"허 변호사 영감이시지요"?

 

하는 젊은 여자의 음성이 들렸다.

 

숭은 깜짝 놀라 돌아보았다. 어떤 잘두루마기 입고 비취와 금으로 장식한 조바위를 쓴 젊은 여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