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밤은 깊어간다. 서울의 밤에는 소리없이 눈이 내린다. 덕수궁 빈 대궐의 궁장에 소복소복 밤눈이 덮인 열시 넘어가 될 때에는 이화학당의 피아노 소리도 그치고 소비에트연방과 북미합중국 영사관도 삼림과 같이 고요한데 오직 마당에 나무들만이 하얗게 눈을 무릅쓰고 섰을 뿐이다.
서울에 금년에는 눈이 적었으나 눈이 오면 반드시 아름다운 경치를 보였다. 오늘밤 눈도 그러한 아름다운 눈 중의 하나였다. 음산한 찬 바람에 날리는 부서진 눈이 아니라 거침없이 사뭇 내려오는 송이눈이었다. 성난 가루눈이 아니요, 눈물과 웃음을 머금은 촉촉한 눈이었다.
그들은 사뿐사뿐 지붕과 나무가지와 바위와 굴러 다니던 쇠똥 위에까지도 내려와서 가만히 앉는다. 가는 가지, 연한 잎이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하여 고개를 흔들면은 놀란 새 모양으로 땅에 떨어지지마는, 그러하지 아니한 동안 그들은-눈 송이들은 하나님의 둘째 명령을 가만히 기다리고 앉아 있다. 언제까지든지.
땅은 희고 하늘은 회색이다. 천지는 밤눈빛이라 할 특별한 빛에 싸인다. 고요하고 깨끗하고 부드러운 천지의 신장면 , 이것은 천지의 아름다운 신장면 중에도 가장 아름다운 것 중의 하나다. 누가 이것을 보나? 사람들은 잔다. 새들도 짐승들도 잔다. 달도 별들도 다 잠이 들었다. 이 평화로운 신장면 을 보는 이는 오직 하느님 자신과 시인(詩人)의 꿈뿐이다. 그렇지 아니하면 잠을 못 이루고 헤매는 근심 품은 사람들이다. 혹은 몰래 만나는 사랑하는 젊은이들이다.
이렇게 평화로운 눈에 덮인 지붕 밑은 반드시 평화로운 단잠뿐은 아니다. 그 밑에 열락(悅樂)의 따뜻한 보금자리도 있겠지마는 눈물의 신, 쟁투의 신, 고통의 신도 없지 아니하다.
옛날 같으면 정동 대궐과 서궐, 미국 공사관, 아라사 공사관과 연락하던 복도가 있던 고개 마루터기를 영성문 쪽으로부터 허둥지둥 올라오는 검은 그림자가 있다. 그는 마치 포수에게 쫓겨오는 어린 사슴과 같이 비틀거리며 뛰어온다.
그림자는 고개 위에 우뚝 섰다.
"내가 어디로 가는 것이야"?
하는 듯이 그는 사방을 둘러본다. 그의 머리와 어깨에는 촉촉한 눈송이가 사뿐사뿐 내려와 앉는다.
그는 이윽히 주저하다가 정동 예배당 쪽으로 허둥거리고 걸어 내려온다. 뒤에는 조그만 발자국을 남기면서 그는 비탈을 뛰어 내려오는 사람 모양으로 재판소 정문앞까지 일직선으로 내려와 가지고는 또 이쪽 저쪽을 돌아보더니 무엇에 끌리는 모양으로 예배당 쪽으로 걸음을 옮긴다. 여배당 앞에 다다라서는 그는 예배당 문설주를 붙들고 쓰러지는 몸을 겨우 붙드는 자세를 취한다. 그의 머리와 어깨는 희다. 회색 하늘에서는 배꽃 같은 눈이 점점 더욱 퍼부어 내린다.
그는 정선이다.
"하나님 나는 어디로 가요"?
하고 정선은 예배당 뾰족지붕을 바라보았다.
정선에게서는 하나님이나 예수에 대한 믿음이 스러진 지 오래였다. 아마 일찍 생겨본 일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십오 년 학교 생활에 꼭꼭 예배당에를 다니고 성경을 보고 기도를 하였다. 그러나 학교를 나온 날부터 그는 일찍 성경을 펴본 일도 없고, 기도를 해본 일도 없었다. 졸업 예배는 그에게는 마지막 예배였다. 그러나 정선은 어찌하여 이 깊은 밤에 허둥지둥 여기를 와서 예배당 문설주를 붙들고 우는가.
정선은 어찌하여 여기를 왔나?
현 의사가 집에 환자 왔다는 기별을 듣고 돌아가버린 뒤에 숭과 정선은 말없이 저녁상을 마주 받았다. 그 침묵은 참으로 견딜 수 없이 무겁고 괴로운 침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