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선은 너무도 사정없는 말에 가슴이 뜨끔하였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면 그것은 사실이었다.
"그럼 내가 무얼 하구 사우"?
하고 정선은 눈에 새로운 눈물을 담그면서 물었다.
"무슨 일을 한단 말이지? 먹고 입지만 말고 무슨 일을 해 본단 말이지"?
하고 현 의사는 여전히 싸늘하였다.
"응, 내가 지금 어쩔 줄을 모르니 바로 말씀해 주어요. 나는 자살할 생각도 해 보았어. 지금도 죽고만 싶어. 허지만 죽는 일밖에 없을까"?
하고 정선은 눈물에 젖은 눈으로 현 의사를 바라본다.
"죽어버리는 것도 한 해결책이지. 세상이란 죽음에 대해서는 턱없이 동정하는 법이니깐"
하고 현 의사는 눈을 감고 무엇을 생각한다.
"허지만."
하고 현 의사는 한 다리를 한 무릎에 바꾸어 얹으며,
"자살이란 것은 무엇을 해결하는 수단 중 제일 졸렬한 수단이다. 어떤 사람이 자살을 하는고 하니 책임감은 있으나 도무지 힘이 없는 사람이거나, 그렇지 아니하면 백 가지 천 가지로 있는 힘을 다 해 보다가 그야말로 진퇴유곡이 되어서 한번 죽음으로써 이름이나 보전하자는 것이다.
그밖에도 남녀의 정사라든지, 부랑자가 돈이 없어 죽는다든지, 또는 정신병적으로 이름은 좋게 철학적으로 자살하는 사람도 있지마는 그것은 우리네 생각으로 보면 다 정신병적이야. 어느 자살이든지를 물론하고 자살한다는 것은 약자의 일이라고 나는 믿는다. 세상에 제일 쉬운 것은 죽는 일이거든. 아무리 못난이라도, 게으름뱅이라도 가만히 있기만 하면 한번은 죽는 것이란 말이다."
"사람이 나라를 위해서 전장에서 죽는다든지, 또 예수나 베드로, 바울 모양으로 세상을 위해서 인류를 구하느라고 죽는다든지, 또 교르다노 브루노 모양으로 진리를 위해서 죽는다든지 하는 것은 존경할 일이요, 저마다 못할 일이지마는 제 맘이 좀 괴롭다고, 세상이 좀 부끄럽다고 죽어?
그건 약하다는 것보다도 죄악이란 말이다.-무슨 죄악이나 죄악은 필경 약한 데서 나오는 것이지마는 가령 정선이로 보더라도 말이다. 간호부가 되어 앓는 사람을 위로하고 도와줄 수도 있고, 학교에 못 가는 애들에게 글자를 가르쳐 줄 수도 있겠고, 돌아다니면서 남의 마룻방에 걸레를 쳐 주기로 세상에 무슨 할 일이 없어서 죽는단 말이냐.
또 네 남편에게 잘 말하면 용서함을 받아서 새로 각설로 행복된 가정을 이룰 수도 있을 것이고-얘, 조선에는 네 남편 같은 사람이 드물다. 다들 돈푼이나 따라다니고, 계집애 궁둥이나 따라다니고 조그마한 문화 주택이나 탐내고 하는 이때에 그이는 돈도 안 돌아보고 미인도 안 돌아보고 도회의 향락도 다 내버리고 세계적으로 빈약하고, 세계적으로 살 재미없는 조선 농촌에 뛰어 들어간다는 것이 영웅적인 행위다.
누구나 다 하는 일인 줄 아니? 나 같으면 그런 남편만 있으면 그야말로 날마다 머리를 풀어서 발을 씻고 발바닥에 입을 맞추겠다. 너는 무엇이 부족해서 그러는지 나는 도무지 네 속을 알 수가 없다."
하고 현 의사는 웃지도 아니하고 길게 한숨을 내어 쉰다. 그것은 제가 한 말이 정성되고 참된 것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정선은 처음보다 냉정한 의식을 가지고 현 의사의 말을 들었다. 그 말은 극히 이론이 정연하였다. 또 현 의사의 말의 주지가,
1. 나를 중심으로 생각지 말 것
2. 숭의 인격이 출중하다는 것
인 것도 알아들었다. 알아들을 뿐 아니라 그 말이 모두 무거운 압력을 가지고 정선의 마음에 스며듦을 깨달아졌다.
"나도 선희 모양으로 기생이나 될까"?
하고 정선은 말을 던졌다.
"무엇"?
하고 현 의사는 깜짝 놀랐다.
"기생이나 될까, 선희 모양으로-선희가 산월이라든가, 기생 이름으로."
하고 정선은 빙그레 웃었다. 현 의사는 정선의 마음이 좀 풀려서 웃는 것만이 기뻤다. 그래서 현 의사도 사내 웃음 모양으로,
"하하하하."
하고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