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은 정선을 자동차에 태우고 오는 길에 혹시 독약이나 먹은 것이 아닌가 하여,
"병원으로 가려오"?
하고 물었다.
"아니요."
하고 정선은 숭을 쳐다보면서 애걸하는 듯이 조그만 소리로 대답하였다.
그럼 독약은 아니로구나 하고 숭은 잠잠하였다.
"어디로 모시랍시오"?
하고 재동 골목을 다 나서서 운전수가 백미러를 들여다보면서 물었다.
숭은 정선을 돌아보았다.
정선은 남편에게만 들릴 만한 소리로,
"집으로."
하고 말하였다.
숭은 아내의 말을 받아,
"정동으로, 방송국 가는 길로."
하고 명령을 하였다. 정동까지 가는 동안에 두 사람은 아무 말이 없었다.
집에 와서 숭은 유월을 시켜 안방에 자리를 깔아 드리라고 명하고 저는 곧 집을 나왔다.
정선은 자리에 누워서 앓았다. 몸과 마음을 다 앓았다. 이 몸이 어찌 될 것인지 방향을 알 수가 없었다.
남편은 필경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것이 아니냐. 제가 집에 온 지 수일을 두고 남편이 저와 자리를 같이하지 아니하는 뜻도 알았다. 그러나 정거장까지 저를 나와 맞아준 뜻, 그 후에도 줄곧 비록 전과 같이 따뜻하지는 아니하다 하더라도 예사롭게 저를 대해 주는 뜻, 오늘도 보통 사람으로 말하면 비록 칼부림까지는 아니 난다 하더라도, 간음한 아내인 제게 대하여 온갖 모욕을 다하여야 할 경우이건만도 도무지 성낸 빛도, 미워하는 빛도 보이지 아니하는 남편의 속을 도무지 알 도리가 없었다.
"무한한 사랑으로 나를 용서함일까. 남편으로서 이러한 아내를 용서할 수 있을까. 만일 남편이 다른 여자와 간통을 하였다 하면 나는 이러할 수가 있을까"
이렇게도 생각해 보았다.
"남편은 내게 대한 사랑이 아주 식어 버려서 치지도외하는 것일까"
이렇게도 생각하고,
"속으로는 견딜 수 없는 분함과 슬픔을 품으면서 남성적인 의지력으로 그것을 꾹 눌러 두었음일까. 마치 단단하고 두터운 땅거죽이 땅속의 지극히 뜨거운 불을 꾹 눌러 싸고 있는 모양으로, 숭의 강한 인격의 힘이 질투와 분노의, 몇 천도인지 알 수 없는 불을 가슴속에 눌러 품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이렇게 생각하면, 숭이란 사람이 천지에 꽉 차도록 무섭고 큰 사람같이 보였다.
지금까지 정선은 숭을 저보다 높은 사람, 더 좋은 사람, 더 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해 본 일이 없었다. 도리어 숭을 시골뜨기 못난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참을 수 없는 것을 참는 것을 볼 때에 보통 사람이 가지지 아니한 무슨 큰 힘을 가진 사람임을 승인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갑진이가 입버릇같이 말하는 모양으로 숭은 반드시 쑥도 아니오, 못난이도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만일 숭이 보통 사람 이상의 분함과 슬픔을 가슴에 품고 꾹 눌러 참고 있다고 하면, 마치 땅속의 불이 화산으로 터져 나오는 모양으로, 또 그것이 한번 터져 나오는 날이면 하늘과 땅의 모든 것을 흔들고 태워 버릴 기세를 보이는 모양으로, 숭의 분통이 한번 터질 때에는 정선의 몸을 가루로 만들고 연기를 만들어 버릴 무서운 위력이 있지 아니할까-이렇게도 정선은 생각해 보았다.
그처럼 숭이가 힘 있고 높은 사람일진대, 저는 숭의 충실한 아내가 되었더면 좋았다고 생각하였다. 또 생각하면 저는 분명히 숭의 값을 잘못 친 것 같았다. 첫째 갑진을 비롯하여 여러 남자가 정선의 인물과 재산을 탐을 내었건만, 숭은 도리어 저와 혼인하기를 아버지에게 대하여 여러 번 거절한 줄을 잘 안다.
정선은 지금까지 이 거절은 숭이가 제 집 문벌과 또 제 인물을 도저히 감당하지를 못하여, 이를테면 숭이가 못나서 그런 것으로만 알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하면 숭이 눈에는 더 큰 다른 것을 보기 때문에 그만한 재산이나, 문벌이나 또 여자의 용모와 교육(정선은 제가 세상에 드문 미인이요, 귀족 집 딸이요, 고등교육을 받았고, 또 십여 만 원의 재산이 있고 한 것을 세상에 비길 데가 드문 큰 자격이요, 자랑으로 믿고 있다)도 돌아보지 않는 것이라고 깨달아지는 것 같았다.
만일 정선이가 숭에게 대하여 애초부터 이만한 존경을 가졌다면, 정선은 숭에게 이처럼 배반하는 아내는 되지 아니하였을 것이다. 이렇게도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제는 동이의 물은 모래 위에 엎질러지지 아니하였느냐. 영원히 다시 주워담을 수 없지 아니하냐.
정선의 맘은 슬펐다.
"내 눈이 삐었어. 이년의 눈이 삐었어"
하고 정선은 울었다.
"어쩌면 갑진이를 그이보다 낫게 보아. 어쩌면 그이를 몰라 보아"?
하고 혼자 애를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