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은 정선을 먼저 자동차에 앉히고 저도 올라 앉았다.
갑진은 자동차에 가까이 오지 아니하고,
"허군, 잘 가게."
하는 한마디를 자동차 바퀴가 두어 번 돌아간 뒤에야 던졌다. 자동차 속에서는 아무 대답도 없었다.
갑진은 자동차가 좁은 길로 연해 사이렌을 울리면서 내려가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숭이란 인물을 생각하였다. 동시에 눈을 내리 떠 제 모양을 돌아보았다.
"아아, 초라한 내 꼴!"
하고 갑진은 눈을 감았다.
"술 주정꾼, 계집애 궁둥이만 따라다니는 놈, 은인의 딸, 친구의 아내를 통한 놈. 직업도 없는 놈, 아무에게도 존경을 못 받을 놈. 그리고 도무지 세상에는 쓸데 없는 놈!"
하고 갑진은 길게 한숨을 쉬었다. 때 묻고 꾸깃꾸깃한 자리옷, 세수도 아니한 얼굴, 음란한 생각만 하는 마음, 이러한 초라한 제 모양이 분명히 눈에 뜨일 때에 갑진은 힘없이 고개를 숙이고 누구를 만날까 두려워하는 사람으로 제 집을 향하고 무거운 걸음을 옮겼다.
갑진은 그 길로 방에 들어와 눈을 감고 누워서 가만히 생각하였다.
갑진에게는 밝은 도덕적 양심이 있었다. 그는 본래 둔탁한 기질이 아니다. 보통학교 이래의 수재다. 그는 오늘날 조선 사람이 받을 가장 높은 교육을 받았다. 다만 그에게는 조상 적부터 전해 오는 이기적인 피가 있고, 여러 백년 동안 게으른 생활과 술과 계집의 향락 생활에 의지력이 마비되고 말았다.
그는 알지마는 행하지 못하고 행하지마는 계속하지 못한다. 그에게는 의리나 나라나 학문이나 주의나를 위하여 저를 희생해 버릴 만한 열도 없고 인내력도 없다. 오직 권력과 향락에 대한 욕심이 있다. 그것도 제 몸과 마음을 예쁘게 하지 아니하고 얻을 욕심이 있다. 이 점에 있어서 갑진은 유전의 희생자다. 운명의 아들이다.
정선도 이 점에서는 갑진과 같다. 그는 밝은 지혜와 양심을 가졌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서는 저 한 몸의 향락이 다른 모든 것보다 컸다. 갑진이나 정선에게는 나라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기를 기뻐하는 일본 사람의 심리를 깨달을 수가 없다. 그들은 도리어 일본 군인이 어리석어서 전장에 나아가 죽는 것같이 생각한다.
그들의 유전적인 자기 중심주의와, 굳어진 뇌세포는 이와 다르게 생각할 자유를 잃어버렸다. 그들로 하여금 연설을 하게 한다면, 글을 쓰게 한다면, 그들의 여러 대 동안 단련된 구변과 문리는 아무도 당할 수 없는 좋은 이론을 전개하게 하고, 그들의 비평안은 능히 아무런 일, 아무러한 사람에게서도 흠점을 집어낼 만하게 날카롭다. 그러나 이 치욕 중독, 향락 중독, 알콜 중독된 도덕적 의지는 말할 수 없이 약하다.
힘 드는 일은 남을 시키고서 가만히 보고 앉았다가 그 일이 잘 되면 제가 한 것이라 하고, 못되면 저 같으면 잘 할 것이라 하는 그러한 약음을 가졌다. 이 모든 것이 거의 그들의 선천적 약점인 것으로 보아서 그들은 새 시대의 건설에 참여할 자격이 없는 동정할 존재다.
그러나 개인의 새로운 결심과 감격은 그들에게 새 생명을 불어 넣을 수가 있을는지 모른다. 만일 노쇠한 민족이 다시 젊어질 수 없다는, 어떤 학자의 말이 옳다고 하면 노쇠한 계급, 노쇠한 혈통의 후예도 영영 다시 젊어질 수 없을는지 모른다.
갑진도 중학교 이래로 여러 번 결심을 한 일이 있었다. 술, 담배를 아니 먹기로 결심한 일도 있고, 여자를 보고 음심을 아니 먹기로 결심한 일도 있고, 날마다 운동을 하기로, 또는 좋은 서적을 보기로, 또는 산에 오르기로, 또는 돈 쓰는 것을 일일이 적어 놓기로, 또는,
"나는 일생을 마르크스주의에 바치리라"
고 결심한 일조차 있고, 또는,
"나는 변호사가 되어 농민, 노동자, 사회 운동자를 위하여 몸을 바치리라"
고 결심한 일도 있었다. 장담한 일도 있었다. 그러나 언제나 말 뿐이요, 그것이 한 달을 계속한 일도 없었다.
오직,
"사내, 주색을 모르고 무엇을 하느냐. 대장부 마땅히 불구 소절할 것이다"하는 결심(?)만이 언제까지나 계속하는 듯하였다.
그래서 갑진은,
"어떻게 하면 돈 십만 원이나 얻나"
"어떻게 하면 저 계집애를 손에 넣나"
하는 생각으로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날마다 조금씩 조금씩 쌓아서 큰 것을 이룬다는 것 같은 일은 갑진과 같은 의지력 상실자에게는 바랄 수 없는 일이었다.
"그것을 누가? 숭이 같은 못난 놈이나"
하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이건영도 이 점에서는 갑진과 같은 부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