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진의 맘은 많이 괴로왔다. 못나게 보던 숭에게는 그가 일찍 생각하지 못한 무슨 무서운 힘이 있는 것 같았다. 그가 성낼 일에-누구든지 성낼 일에 성을 내지 아니하는 숭의 태도가 못난 것이 아니라, 제가 지금까지 생각하지 못하던 무슨 높은 힘인 것 같았다. 갑진은 제가 숭보다 지혜가 있고 힘 있는 사람이라던 생각이 깨어지는 것을 눈앞에 보았다. 저는 숭이에게 비겨 "가치"가 떨어지는 사람이라는 것을 느꼈다. 그것이 슬프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하였다.
"심기일전"
하는 생각도 났다.
"방향전환"
하는 생각도 났다. 언젠가 아마 한 선생에게 들은, "Clean life(깨끗한 생활)"가 인격의 힘의 근원이라던 말도 생각났다. 담배도 아니 먹고, 술도 아니 먹고, 계집애 집에도 아니 가고, 돈 욕심도 아니 내고, 오직 청년을 지도하기에만 힘을 쓰고 있는 한 선생의 생활은 분명히 깨끗한 생활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한 선생에게 사람을 감복시키는 힘이 있음에 틀림없었다. 그 다음에 깨끗한 생활을 하는 이로는 분명히 허숭이었다. 허숭에게 무슨 힘이 있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으나, 오늘은 분명히 그것을 느꼈다. 분명히 허숭은 제가 꿈도 못 꾸던 무슨 힘을 가졌다는 것을, 싫지마는 인정하지 아니할 수는 없었다.
"나도 생활을 고칠까. 나도 술, 담배, 계집을 버리고 깨끗한 생활을 해 볼까. 나도 세상을 위해서 몸 바치는 일을 해 볼까, 그렇게 깨끗한 일생을 보내 볼까"
이렇게 생각하면 갑진은 가슴이 뜀을 깨달았다.
그러나 베드로우브 주머니에 있는 해태〔궐련 이름〕갑을 만질 때에 한 대 피워 물고 싶었다. 갑진은 모든 생각 다 내버리고 벌떡 일어나 성냥을 찾아 한 대를 피워 물었다. 깊이 뱃속까지 들어가라 하고 연기를 들이마셨다. 정선이 야단통에 두어 시간이나 담배를 끊었다가 먹는 담배라 머리가 아뜩하는 것 같았다.
"요것이 의지력을 마비하는 것인가"
하고, 갑진은 한번 웃고, 그 담배를 재떨이에 북북 비벼버리고 그리고는 주머니에 든 해태갑을 꺼내어서 두 손으로 비틀어 두 동강에 끊어서 쌍창을 열고 마당에 홱 집어 던졌다. 그리고 갑진은,
"난 담배를 끊는다. 다시는 담배를 입에 아니 댄다!"
하고 혼자 소리를 지르고, 그 결심을 더욱 굳게 하기 위하여 두 주먹을 불끈 쥐어서 허공에 내어둘렀다.
"그러나 술은"?
하고 갑진은 생각한다. 갑진의 눈에는 대 달린 유리잔에 부어진 노란 위스키가 보인다. 그것은 갑진이가 가장 사랑하는 술이다. 그것을 몇 잔 마시고 얼근하게 취하게 된 때에 젊은 이성의 손을 잡고 허리를 안고 음란한 소리를 하는 저를 상상하였다.
그것은 진실로 버리기 어려운 유쾌한 일이었다. 그러나 갑진은 그러한 이성들에게서 전염한 매독과 임질을 생각하고 그것을 의사에게 보일 때에 부끄럽던 것을 생각한다. 그래서 ○○이라는 사람은 이 위험을 면하기 위하여 꼭 처녀와 유부녀를 따라 다닌다는 것을 듣고, 갑진이 저도 그것을 배우려 한 것을 생각한다. 그러나 갑진의 눈 앞에는 봄날 암캐를 따라다니는 수캐의 떼가 보인다.
"사람이란 그보다 좀더 높은 것이 아닐까."
하고 갑진은 타구에 침을 탁 뱉는다.
"빌어먹을 것 마르크시스트나 될까."
하고 갑진은 열 손가락으로 머리를 득득 긁었다.
"마르크시스트가 되더라도 요새 조선 마르크시스트들보다 백배나 낫게 되련만" 하고 그는 제 학식과 재주를 생각한다.
"구라파 한 새 괴물이 있으니…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이 모양으로 공산당 선언서의 문구를 생각해본다.
그러나 법학을 배운 그에게는 치안유지법이 생각이 난다. 소유권이나 국체의 변혁을 목적으로 결사를 하는 자는 삼년으로부터 사형…
갑진의 눈앞에는 감옥이 보인다. 그는 학생시대에 형법 선생에게 끌려 감옥 구경을 한 일이 있다. 그 맨마루바닥의 음침한 방, 그 미결수의 야청옷과 복역수의 황토물 들인 옷, 그 쇠사슬, 더구나 머리에 쓰는 그 용수-이런 것들은 갑진에게는 그렇게 유쾌한 광경은 아니었다.
더구나 그 사형 집행장. 갑진은 일찍 저는 검사가 되리라. 검사가 되어 법정에서 논고를 하는 것도 유쾌한 일이지마는, 사형 집행을 임감하는 것을 더욱 재미롭게 생각한 일도 있다. 그 미운 신문 기자놈을 한번 사형 집행하였으면 하고 손뼉을 치고 웃은 일도 있었다. 그러나 제가 사형수가 되어서 그 자리에 서고 싶은 생각은 털끝만큼도 없었다.
"나는 마르크시스트는 싫다. 무릇 감옥과 사형대에 관계 있는 것은 싫다!"
하고 갑진은 몸을 한번 흔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