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선은 얼른 책상에 돌아 앉아서 편지 한 장을 써서 유월에게 주며,
"너 이것 가지고 다방골 병원댁에 갔다온. 얼른 오시라고."
하고는 체경에 제 꼴을 비쳐 보았다. 머리는 부하게 일어나고, 옷은 유치장에서 나온 것같이 구겨지고, 얼굴은 앓다가 뛰어 나온 것 같았다.
"내가 어쩌다가 이 꼴이 되었나"?
하고 정선은 낙심이 되었다.
"이러다가 내가 어찌 될 것인가"
하는 생각도 났다.
"산에 가서 승이나 될까"
하고 정선은 생각하였다. 이것은 조선 여자가 화날 때에 생각하는 법이다.
정선은 금강산에 수학여행 갔을 때에 승에게 대한, 종교적은 아니나 시적인 감흥을 느낀 일이 있었다. 그것이 생각났다. 그러나 여승의 차디차고 고적한 생활을 하기에는 정선은 너무도 번화하고 정욕적이었다.
"죽어버릴까"
하는 생각도 났다. 이 생각은 팔자 좋게 자라난 정선으로서는 도무지 생각해 본 일이 없었다. 오류장 철로길에서 차에 치어 죽은 홍, 김 두 여자(그들은 정선과 동창이었다)를 정선은 비웃었다. "죽기는 왜, 봄같은 인생에 꽃같은 청춘으로 죽기는 왜"? 이렇게 생각한 것이었다. 정선에게는 인생은 봄과 같고, 청춘은 꽃과 같고 생활은 음악회와 같았다.
그는 스스로, 저는 모든 괴로움과는 전혀 인연이 없는 선녀로 생각하였던 것이었다. 무엇이나 부족함이 있나, 가문이 좋것다, 재산이 있것다, 인물이 잘 났것다, 재주가 있것다, 좋은 교육을 받았것다, 정선이가 일생에 할 일은 오직 즐기는 것뿐이요, 즐기는 것도 싫어지거든 자는 것뿐인 듯하였다.
아마 만물이 면치 못한다는 죽음도 정선 하나만에는 오지 못할 것 같았다. 그는 여왕이요, 여왕이라도 mortal(죽을) 여왕이 아니라 immortal(안 죽을)한 celestial(천국의)한 여왕이었다. 그러면서도 Diana(달)와 같이 영원한 아름다움과 사랑을 누리는 여왕이었다.
하지마는 이태도 다 못되는 세월이 지나가는 동안에 정선은,
"죽었으면…"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 망신, 이 욕"
하고 정선은 제 앞에 닥쳐오는 것이 망신과 욕뿐인 것을 보았다. 도무지 망신이나 욕을 맛보지 못한 정선에게는 망신과 욕은 죽기보다 싫은 것이었다. 정선은 세상이 저를 향하여 손가락질하고 비웃는 것을 보고는 살 수가 없는 것 같았다.
"죽어버리자"
하고 정선은 체경에서 물러나 방바닥에 펄썩 소리가 나게 주저앉았다.
기찻길, 양잿물, 칼모틴 등등 죽는 방법을 여러 가지로 생각해 보았다. 물에 빠지는 것, 목을 매는 것, 칼로 동맥을 따는 것, 정선은 소설에서와 신문에서 본 자살의 여러 장면을 상상해 보았다. 물에 빠져 죽은 시체, 목매어 죽은 시체, 철도에 치어 사지가 산란한 시체-이러한 것도 눈 앞에 떠올랐다. 그 어느 것도 보기 좋은 꼴은 아니었다.
"남편을 따라가 농촌 사업에 일생을 바칠까"
하고 정선은 살여울을 눈 앞에 그려보았다. 농민 아동들에게 어머니와 같이 사모함을 받으면서 농민 교육사업에 몸을 바치는 것-그러한 것도 눈 앞에 그려보았다.
그러나 남편이 과연 저를 용서할까. 아니, 남편이 지금 저를 죽여버리려고 칼이나 육혈포나를 사러 간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도 불현듯 나서 정선은 몸에 소름이 끼쳤다.
"남편은 맘만 나면 무슨 일이라도 할 사람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남편이 저를 죽일 확실성이 더한 듯하였다.
"남편이 어디를 갔을까-" 하고 정선은 정신없는 눈으로 방안을 둘러보았다.
방안에는 구석구석 남편이 피 묻은 칼을 들고 저를 노려보는 것만 같았다. 정선은 아까 기색하였던 신경의 격동이 아직 가라앉지를 아니한 것이었다.
"유월아!"
하고 정선은 무서워서 불렀다. 그 소리에 놀라 유모가 뛰어 들어왔다.
정선의 입술에는 핏기가 전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