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 의사는 환자를 보내고 수술복을 벗고 안마루인 양실에 들어와서 소파에 앉아 담배를 피워 물었다. 그는 남자 모양으로 한 다리 위에 한 다리를 얹고, 고개를 교의 뒤에 기대고, 시름없이 공상을 하고 있었다. 테이블 위에 놓인 홍차잔에서는 연연한 김이 가늘게 올랐다.

 

역시 이성이 그리웠다. 큰소리는 하지마는 혼자 있는 것은 적적하였다. 나이 삼십이 넘으면 여자로서 앞날의 젊음이 많지 아니한 것이 느껴졌다.

 

"혼인을 할까"

 

하고 현 의사는 요새에 가끔 생각하게 되었다. 정선이가 다녀간 뒤로 웬일인지 더욱 그런 생각이 났다. 봄의 꽃같던 정선이가 내외 금슬이 좋지 못하여 애를 쓰는 것을 보고는 혼인할 생각이 아니 남직도 하건마는 도리어 그와 반대였다. 젊은 아내로의 괴로움-현은 그것이 도리어 그립고 가지고 싶었다. 어머니로의 괴로움도 가지고 싶었다.

 

"고생이 재미지"

 

하는 어떤 시집간 친구의 말이 결코 해학으로만 들리지 아니하였다. 내외 싸움, 앓는 자식을 위해 밤을 새우는 애절함-이런 것은 부인, 소아만 날마다 접하는 현 의사로서는 이루 셀 수도 없이 듣는 이야기였다. 도무지 어떤 부인이든지 말을 아니하면 몰라도 한번, 두번 사귀어 말을 하면 저마다 고생이 없는 사람이 없었다. 있다면 그것은 허영심 많고 거짓말 잘하는 여자여서 제 집에는 돈도 많고, 집도 좋고, 남편도 잘 나고, 금슬도 좋다는 사람뿐이었다.

 

"글쎄 뭣하러들 시집들을 가"?

 

하고 현은 마치 본능과 인정을 다 태워 버린 식은 재 되는 것같이 빈정대지마는, 그러나 겨울 시내의 굳은 얼음 밑에도 물은 여전히 울고 흘러가는 것과 같이, 가슴의 속속 깊이는 젊은 여성의 애욕의 불길이 탔다.

 

"허지만 누구한테 시집을 간담"?

 

하고 현 의사는 혼자 탄식하였다. 눈이 너무 높았다. 그것을 현은,

 

"어디 조선에 사람이 있어야지"

 

라고 설명하는 버릇이 있다.

 

현 의사는 상자 속에 있는 여러 가지 편지들의 필자인 사내들을 생각해 본다. 이 박사, 김 두취, 문학 청년, 부랑자, 교사 등등. 그러나 현이 일생을 의탁하고자 하는 사람은 없었다.

 

"한 남자에게서 어떻게 모든 것을 찾소. 갑에게서는 인물을 취하고, 을에게서는 재주를 취하고, 병에게서는 체격을 취하고, 정에게서는 말을 취하고 또 돈을 취하고 이 모양으로 해야지, 한 남자가 모든 것을 구비할 수야 있소"?

 

하던 어떤 기생 친구의 말도 생각하였다. 콜론타이의 붉은 사랑식 연애관도 생각하였다.

 

"허기는 일생을 같이 살자니 문제지, 남편을 고르기가 어렵지, 하루 이틀의 남편이나 구하자면야, 이 박사나 편지질하는 무리들도 하루 이틀이라면야…"

 

하고 현 의사는 제 생각이 우스워서 깔깔 웃었다.

 

"네"?

 

하고 현 의사가 웃는 소리에 혹시 무슨 일이나 있나 하고 계집애가 건넌방에서 뛰어나왔다.

 

"아니다. 나 혼자 웃었다."

 

하고, 도로 건넌방으로 들어가려는 것을,

 

"얘, 너 자라서 시집 갈래"?

 

하고 물었다.

 

"싫어요, 시집을 누가 가요."

 

하고 계집애는 부끄러워서 몸을 비틀면서,

 

"언제든지 선생님 모시고 있을 테야요."

 

하고 말하였다.

 

"내가 시집을 가면"?

 

"네"?

 

하고 계집애는 못 들은 소리나 들었다는 듯이 눈을 크게 뜬다.

 

현 의사가 이렇게 있을 때에 유월이가 정선의 편지를 가지고 왔다.

 

"오냐."

 

하고 현 의사는 유월의 손에서 편지를 받으면서

 

"너의 아씨 언제 오셨니? 시골 가셨더라지"?

 

하고 편지를 뜯는다.

 

"우리 마님요"?

 

하고 유월은 현 의사의 아씨란 말을 정정한 뒤에,

 

"벌써 오셨습니다. 사흘 됐나, 나흘 됐나"?

 

하고는,

 

"얼른 좀 오십사고요."

 

하고는 동무의 손을 잡고 웃고 소곤거린다.

 

"너의 허 선생도 오셨니"?

 

"네, 바로 마님 떠나신 날 오셨어요."

 

현 의사는 고개를 끄덕끄덕한다.

 

"무슨 급히 의논할 일이 있단 말야"?

 

하고 현 의사는 담배 한 대를 더 붙이고 가만히 눈을 감는다. 마치 샬록 홈즈가 무슨 큰 문제를 해결하려는 모양으로.

 

정선이가 낙태시키는 방법을 묻던 것, 정선이가 허둥지둥하던 것, 또 정선이가 왔다 가는 길로 시골로 내려간 것, 이 모든 것이 다 무슨 수수께끼를 싸고 도는 사실인 듯하였다.

 

"역시 혼인이란 귀찮은 것인가. 혼자 사는 것이 제일 편한가"

 

하고 현 의사는 담배를 꺼버리고,

 

"택시 하나 불러라."

 

하고 명령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