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장안에 이 박사 모르는 여자 있나요? 얼굴 밴밴한 계집애로 이 박사 편지 한두 장 안 받아 본 이 있고"?
하고 산월은 소리를 죽이고 웃느라고 얼굴과 목의 근육을 실룩거린다.
"어디서 만나셨소"?
하고 숭이가 산월에게 물었다.
"어느 좌석에서 한번 만났는데 주소를 적어 달라기에 적어 주었지요. 했더니 자꾸만 편지질이로구먼. 나를 동정한다는 둥, 존경한다는 둥, 사랑한다는 둥, 그리고 서너 번이나 찾아왔겠지요. 누구시냐고 명함을 내라고 하면 가버린단 말야요. 그럴 걸 오긴 왜 오우"?
하고 고개를 들어 이 박사 쪽을 바다보더니,
"일어나 가려고 들어, 날 보고 겁이 났나-잠깐 계세요, 내 가서 좀 놀려먹고 올 테니."
하고 산월은 기생식 걸음으로 이 박사 쪽으로 간다.
숭은 반쯤 고개를 돌려서 그 편을 바라보았다.
"하우 두 유 두, 닥터 리이"?
하고 산월은 막 일어나려는 이 박사의 앞에 손을 내어민다.
이 박사는 낯이 빨개지며 할일없이 산월의 손을 잡는다.
산월은 유창한 영어로,
"아임 베리 소리(참 미안해요), 여러 번 편지 주신 걸 답장을 못 드려서 참 미안합니다. 또 세 번이나 찾아오신 것을 하인들이 몰라 뵈어서 미안해요. 용서하세요."
하고는 쩔쩔매는 이 박사를 유쾌한 듯이 정면으로 웃는 눈으로 바라보면서,
"이 양반들은 당신 매씨세요"?
하고 그것도 영어로 시스터스(누이들)라는 시자에 가장 힘있는 액센트를 주어 말한 뒤에, 그 두 여자를 향하여서,
"용서하세요. 난 백산월이라는 기생입니다. 노상 이 박사의 가르침을 받지요."
하고 악수를 청한다.
두 여자들도 부득이하는 듯이 손을 내민다.
이 박사는 두 손을 마주 비비고 섰다가 겨우 흩어진 부스러기 용기를 주워 모아서,
"난 댁에 찾아간 일은 없는데, 혹시 하인들이 잘못 본 게지요."
하고 어색한 변명을 한다.
"하하."
하고 이번에는 성악으로 닦은 분명하고도 높은 소리로,
"제가 안할 말씀을 했습니까. 그러면 용서하세요."
하고 그 다음에는 영어로,
"나는 이 부인네들이 매씨들이신 줄만 알았지요, 친구시거나. 이 박사께서는 심순례 씨와 약혼하셨다는 말씀을 들은 지 오래길래, 호호호."
하고 웃었다.
"아니지요. 심순례와 일시 교제는 있었으나 약혼했단 말은 허전이구요, 또 산월씨 댁에 찾아갔다는 것도 아마 댁 하인들이 잘못 본 게지요."
하고 극히 엄숙한 태도로 말을 한다.
"그런지도 모르지요. 제가 창 틈으로 내다보니까 이 박사 같으시고 또 음성이 이 박사 같으시고, 허기는 명함을 줍시사 하니까 명함은 아니 내시더구먼요. 그러니까 이 박사와 똑같이 생긴 다른 양반이시던 게지. 하하하, 용서하세요."
하고 산월은 고개를 흔들면서 유쾌하게 웃었다.
그러는 동안에 여자들은 다 달아나고, 이 박사도 산월에게 잠깐 서양식으로 고개를 약간 숙이고는 나가버리고 만다.
산월은 이 박사가 사라진 뒤를 향하고, 또 한번 웃고 나서는 숭의 곁으로 온다.
"어때요. 내가 언 엑설런트 엑트레스(한 빼난 여배우)지요."
하고는 위스키를 단숨에 쭉 들이키고는 한 손으로 이마를 받치고,
"흐흐흐흐, 하하하하."
하고 우스워서 죽으려고 든다.
숭도 따라서 웃었다. 숭이 웃으면 산월은 더욱 우스워서 어깨와 등을 들먹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