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는 실연의 슬픔과 질투의 불길이 일어날 때마다 피아노의 건반을 아무렇게나 힘있게 두들겼다. 그것이 버릇이 되어 마침내 한 곡조를 이루게 되었다.

 

"듣기 싫다!"

 

하고 어머니가 역정을 낼 때에는, 순례는 어린애 모양으로 하하 웃었다. 그런 뒤로부터는 어머니의, 

 

"듣기 싫다!"

 

하는 소리가 아니 나면 섭섭해서 그 소리가 들릴 때까지 두들겼다.

 

한번은 학교에서 동무들에게 불쾌한 소리를 듣고는 피아노 연습하는 방에 혼자 돌아와 앉아서 화날 때에 치는 곡조를 쳤다. 학교 피아노는 집 피아노보다 좋은 것이기 때문에 소리가 심히 웅장하였다.

 

어머니의 듣기 싫다는 소리도 아니 들리는 곳이라 몇번을 되풀이하여 어깨짓, 몸짓도 하여가면서 건반을 부서져라 하고 두들겼다.

 

이때에 문이 열렸다. 순례는 깜짝 놀라 피아노를 그치고 돌아보았다. 그것은 미스 엠이라는 음악 선생님이었다.

 

"지금 피아노 순례 쳤소"?

 

하고 미스 엠이 순례를 바라보고 물었다.

 

순례는 무슨 죄나 지은 것같이 낯을 붉히며,

 

"네."

 

하고 고개를 숙였다.

 

미스 엠은 구두 소리를 내고 순례 곁으로 걸어와 손가락으로 순례의 어깨를 누르며,

 

"내 딸! 그거 무슨 곡조요? 어느 책에서 보고 배웠소"?

 

하고 물었다. 미스 엠의 부드러운 음성은 순례의 죄 지은 무서움을 얼마쯤 완화하였다.

 

"아냐요. 장난으로 함부로 쳤어요."

 

하고 순례는 잠깐 눈을 들어 엠을 우러러보았다.

 

"아니오"?

 

하고 미스 엠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나 순례 잘못했다고 책망하는 것 아니오, 지금 친 그 곡조 대단히 힘 있고, 열정 많소. 어떤 때, 어떤 곳 좀 규칙 아니 맞는 것 있어도, 그 곡조 베리 나이스(대단히 좋소)."

 

하고 어깨에 놓았던 손으로 순례의 턱을 만졌다. 귀엽다는 뜻이다. 순례는 눈물이 쏟아짐을 금할 수가 없었다. 얼른 고개를 돌리고 소매 속에 있던 손수건으로 코를 푸는 체하고 눈물을 씻었다.

 

미스 엠은 손을 순례의 어깨 위로 넘겨서 순례의 눈물에 젖은 뺨을 만지며, 순례의 머리에 자기의 뺨을 대고,

 

"내 딸, 순례. 내 말이 순례를 슬프게 했소? 그런 생각 조금도 없소."

 

하고 미안한 뜻을 표하였다.

 

순례가 우는 것이 미스 엠의 말에 노여워서 하는 것이 아님은 말할 것도 없다.

 

미스 엠은 순례가 사모하는 선생이요, 또 순례를 사랑하는 선생이다.

 

미스 엠은 과년한 여자들만 모여 있는 학교에서 가장 젊은 여성들의 고민과 몽상을 동정하는 선생이다. 순례는 일찌기 이 선생에게 자기의 가슴속의 고민을 하소연한 일은 없지마는(순례가 어느 사람에게도 그러한 일이 없는 것과 같이) 미스 엠은 홀 부인(저번 순례를 평양으로 데리고 가던)을 통하여 순례의 슬픔을 대강은 짐작할는지도 모른다. 왜 그런고 하면, 홀 부인과 미스 엠은 한집에 사는 의좋은 벗이기 때문에.

 

그러면 순례가 우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맘을 깎고 저미는 슬픔을 잊자고 함부로 치는 피아노가 어느덧 한 곡조를 이룬 것만 해도 서러운 일이었던 그것이, 잘 지어진 곡조라고, 마치 무슨 명곡이나 같이 칭찬받은 것이 아니 서러울 수가 없지 아니하냐.

 

"아냐요."

 

하고 순례는 강잉하여 웃는 낯을 지어가지고 일어나며,

 

"선생님 말씀으로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공연히 딴 생각을 하고…."

 

하며 피아노를 덮었다.

 

"으흥, 내 아오, 내 아오."

 

하고 미스 엠은 가슴에 매어달린 금 만년필을 들어 피아노 위에 얹힌 보표 종이에, "An Angels Lamentation" <천사의 슬픈 가락> "The Morning Storm"<아침의 폭풍우> "Virgins Sorrow" <처녀의 설움> 이러한 것을 적어서 순례에게 보이며,

 

"아까 그 곡조, 순례 지은 곡조 이름 무엇이오"?

 

하고 물었다.

 

"이름 없어요. 아무렇게나 친 것이야요, 장난으로."

 

하고 웃음을 지었다.

 

"그러면 내 곡조 이름 짓겠소. 이 세 가지 중에 가장 순례 맘에 맞는 것 고르시오."

 

하였다.

 

순례는 그 종이를 받아 이윽히 들여다보다가 "Sorrow(슬픔)"라는 글자만에 줄을 그었다.

 

미스 엠은,

 

"sorrow, sorrow"

 

하고 고개를 끄덕끄덕하며 순례의 등을 두어 번 가볍게 두드리고, 그 곡조 이름 적은 종이를 들고 나가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