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는 그들의 화제에 자기도 올랐을 것을 생각하고, 이 유월이라는 계집애가 자기가 이 박사라는 빤질빤질한 색마에게 버림받은 것을 들어 알 것을 생각함에 머리로 피가 몰려 올라와서 앞이 아뜩아뜩함을 깨달았다.

 

"아아, 왜 내가 그 악마의 기억을 완전히 떼어버리지 못하는고? 이 악마가 나를 버린 것과 같이 이 악마의 그림자는 왜 나를 버리지 아니하는가. 내 영혼을 죽여버리고도 부족하여 내 육체까지 빼빼 말려서 죽이고야 말려는가."

 

하고 순례는 견딜 수 없이 괴로와 대문을 나섰다. 대문을 나서서 고개를 숙이고 몇걸음 걸어가다가 딱 마주친 사람이 있었다. 순례는 깜짝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그것은 이건영이었다.

 

이건영 박사도 한순간은 멈칫하였으나 곧 빙그레 웃으며 모자를 벗고,

 

"아, 순례씨. 오래간만입니다. 어디 다녀오세요? 댁도 다 안녕하세요"?

 

하고 아주 아무 특별한 과거의 관계없는 친구 모양으로 냉정하게 인사를 한다. 털끝만치도 미안해하는 양도, 겸연쩍어하는 빛도 없다.

 

그와 반대로 순례는 마치 몸과 마음의 관절이 다 찌그러지고 머리는 큰 바위에 부딪친 것같이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다음 순간, 순례가 의식을 회복할 만한 때에는 순례의 전신은 분노의 불길로 탔다. 그는 벌써 이 박사를 보고 기절하여 한민교의 팔에 붙들리던 계집애는 아니었다. 그 동안의 괴로움과 슬픔-처녀로서 순례가 처음 당하는 이 시련은 순례를 얼마만큼 굳세게 하였다. 저항력이 있게 하였다. 이를테면 이건영은 순례를 슬프게 하였으나 동시에 굳세게 하였다. 순례는,

 

"좀 부끄러울 줄을 아시오! 회개할 줄 모르고 미안해할 줄은 모르더라도 좀 부끄러워할 줄을 아시오! 여러 계집애들을 후리고 돌아다니다가 이제 또 남의 혼자 있는 유부녀를 엿보고 다녀요? 학자는 그렇소? 인격 높은 사람은 그렇소? 당신이 미국까지 가서 배워온 재주가 그것뿐이오? 그렇게 뻔뻔스러운 것뿐이오? 그 빨간 넥타이는 다 무엇이오? 그 빤질빤질한 머리는 다 무엇이오? 다른 모든것보다도, 죄를 짓고도 부끄러운 일을 저지르고도 붉힐 줄을 모르는 그 뻔뻔한 상판대기는 다 무엇이오"?

 

하고 막 윽박질렀다.

 

이 박사는 조금도 불쾌한 빛도 없이, 그렇다고 빈정대는 웃음도 없이, 마치 무슨 사무적 보고나 듣고 있는 모양으로, 극히 침착하게, 냉정하게 듣고 있었다. 그곳에 이 박사의 영웅적 기상이 있는 것도 같았다.

 

이 박사는 순례의 말이 다 끝나기를 기다려서 다 끝난 뒤에도 마치 지금까지 들은 말을 한번 더 요량하고 해석하는 듯이, 또 마치 순례가 더 할 말이 없도록 다 해버리기를 기다리는 듯이 잠깐 간격을 둔 후에야 극히 평정한 어조로,

 

"좀 잘못 생각하고 하시는 말씀이십니다. 나는 어느 여자를 후려낸 일은 없고, 하물며 어떤 유부녀를 엿본 일도 없습니다. 지금 하신 말씀은 아마 무엇을 잘못 생각하시고 하신 말씀인 듯합니다. 순례씨는 너무 흥분되셨습니다. 댁에 가셔서 좀 드러누우시지요."

 

하고 순례를 두고 걸어가려는 기색을 보였다.

 

순례는 지금 듣는 이 박사의 말에 분명히 궤변이 있고 허위가 있고 가식이 있고 악마적인 악의가 있는 것까지도 잘 알았다. 그러나 유치한 순례의 논리적 숙련은 그중에 어떤 점을 집어내어서 반격을 하여야 이 박사의 악마적 심장을 꿰뚫을지를 몰랐다. 그리고 다만 가슴만 터질 듯이 아팠다. 발을 동동 구르고 가슴을 쥐어뜯고 싶도록 안타까왔다.

 

"이놈을 칼로 찔러 죽여버릴까. 그리고 그 빤빤한 낯가죽을 벗기고, 그 빤빤한 소리를 하는 주둥이를 찢어버리고, 그 이기적이요, 음욕이 꽉 찬 배때기를 찢어버릴까."

 

이런 무서운 생각까지도 지나갔다.

 

순례는 제 생각에 저 스스로 놀랐다. 그리고 순례 편이 먼저 걸음을 빨리하여 가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