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박사는 눈을 감고 고개를 숙이고 이윽히 생각하다가 정선의 집으로 향하던 발을 돌려 순례의 뒤를 따라갔다.
순례는 빨리 걸었다. 그의 검은 치마는 어둠에 사라지고 지붕을 넘어서 흘러오는 전등 불빛에 그 흰 저고리와 목과 어깨의 선이 걸음을 걷는 대로 빠른 리듬을 이루었다.
순례가 자기를 바라보지 아니하게 된 순간에 이건영의 몸은 갑자기 떨리기를 시작하였다. 마치 전신의 피가 다 분통으로 모여들고 사지와 피부에는 한 방울도 남지 아니한 것 같았다. 손발이 식고, 눈에서만은 불이 나올 듯하였다. 만일 밝은 데서 본다고 하면 그의 입술은 파랗게 질렸을 것이다. 바짝 마른 입술을 축이려 하여도 입안에 도무지 침이 없었다.
"흥, 고약한 계집년이!"
하고 건영은 두 주먹을 한번 불끈 쥐었다.
어떻게 이 분함을 참고 순례의 앞에서는 태연하고 평정함을 꾸몄던고?
그러나 다음 순간에 건영은 순례가 그리움을 깨달았다. 그의 부드러운 음성, 포근포근한 손, 따뜻한 입김, 이런 것을 회상하면 순례를 놓쳐버린 것이 아까왔다. 그렇게 유순하게, 마치 목자에게 맡기는 양 모양으로 자기에게 전신과 전심을 주던 순례를 아주 놓쳐버린 것이 아깝기도 하였다.
그때에는 비록 부잣집 딸 은경에게 맘이 쏠린 때문이었지마는 이제는 그 은경도 없지 아니하냐. 그뒤에도 누구누구 돈 있는 집 딸을 삼사 인이나 따라다녔으나 다 놓쳐버리지를 아니하였느냐. 이제는 친구의 아내로서 혹시 이혼을 할 듯도 싶은 정선을 따라다니지마는 정선에게는 벌써 김갑진이 있지 아니하냐. 차라리 순례나 그냥 가지고 있었더면, 건영은 이런 생각을 하였다.
건영의 눈에는 오직 돈이 있었다. 아무리 해서라도 돈이 있고 싶었다. 그렇지마는 건영의 재주로는 돈을 모을 가망이 없었고, 또 자기가 여러 해, 아마 여러 십년을 두고 돈을 모으기에 각고면려(刻苦勉勵)할 생각도 끈기도 없었다. 그에게 있는 것은 오직 호적상으로 독신인 것과, 박사인 것과, 외양이 여자의 맘을 끌게 생긴 것을 밑천으로, 아니 미끼로 재산과 아름다운 아내를 한꺼번에 낚아올리는 것뿐이었다.
이 박사가 미국서부터 태평양을 건너올 때에도 그의 일편단심은 돈 있는 미인한테 장가를 드는 것이었다. 그러나 불행히 이 소원은 이루어지지 못하고 간 데마다 망신만 하고 이제는 좋지 못한 소문-계집애들 궁둥이만 따라 다니는 놈이란-이 퍼져서 다시는 따라올 여자는 없었던 판에 오늘은 천만 의외에도 순례한테 이렇게 톡톡한 망신을 한 것이다. 이건영 박사의 운수도 이제는 다하였는가 하며 분한 중에 일종의 실망을 느끼고, 다음 순간에는 다시 순례를, 제것으로 만들어볼 욕망을 일으킨 것이었다.
"순례는 어리석은 (순례의 순진한 성품이 이건영에게는 어리석음으로 보였다) 계집애니까 내가 다시 귀애주기만 하면 따라오리라."
이렇게 생각하매 건영은 저으기 맘이 편안해져서 그 바싹 마른 파랗게 질린 입술에는 웃음조차 떠돌았다.
"어떻게 할까. 무슨 물건을 사가지고 순례의 집에를 찾아가볼까. 찾아가서 과거에 잘못한 것을 말하고 정식으로 혼인을 청할까. 그러기만 하면 대번에 되기는 되겠지마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