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는 방에서 나왔다.

 

포플라 잎사귀들이 늦은 가을 바람에 버석버석 소리를 내며 학교 구내의 잔디밭과, 길과, 돌 층층대에 굴렀다. 테니스를 치던 학생들도 배고픔과 가을 석양의 엷은 빛에 불안을 깨달은 듯이 라켓을 들고 기숙사로 들어왔다.

 

순례는 교문을 나서 집을 향하고 걸어나왔다. 가슴의 슬픔은 약간 흩어졌으나, 묵직하고 얼얼한 것은 잊을 수가 없었다.

 

순례는 바로 집으로 가려다가 아직 밥도 아니 되었을 것 같고, 또 심사도 산란하여 이야기나 좀 하고 가려고 정선의 집을 찾았다.

 

"안 계신데요."

 

하는 유월의 말을 듣고, 순례는,

 

"어디 가셨니"?

 

하고 물었다.

 

"저 잿골 서방님하고 경성 운동장에 야구 구경 가셨어요."

 

하고 유월은 앞서서 길을 인도하며,

 

"들어오시지요. 인제 곧 돌아오실걸요, 머."

 

하고 시계를 바라본다. 대청에 걸린 시계는 여섯시를 가리키고 있다.

 

순례는 유월의 말대로 마루 끝에 앉아서 정선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기로 하였다. 그리고 마치 하늘이 일어나는 구름에게 자리를 맡기는 모양으로, 순례는 지나가는 생각에 머리를 내어맡겼다. 동무들 중에 행복된 이가 누구냐. 더구나 시집가서 잘 사는 이가 누구냐. 정선도 자기 말을 듣건댄 불행한 사람이었다.

 

정선의 집에 모이는 시집간 여자들의 사정을 듣건댄 다 잘 살지는 못하였다. 혹은 남편이 직업이 없고, 혹은 남편이 약하여 부부의 낙이 없고, 혹은 남편이 돈과 건강은 있으나 지식과 교양이 부족하고, 혹은 다른 부족은 없으나 마음이 허랑하여 다른 여자를 따르고, 혹은 점점 애정이 줄고, 혹은 돈을 잘 안 주고, 또 혹은 시부모가 좋지 못하고 도무지 가지각색의 이유로 행복된 사람은 하나도 없는 모양이다.

 

"행복은 오직 남자를 사랑해보지 아니한 숫처녀의 것인가"?

 

하고 순례는 한숨을 지었다.

 

이때에 전화가 왔다.

 

유월이가 뛰어가 수화기를 떼어들었다.

 

"어디세요? 네. 마님이셔요? 네. 유월입니다. 네, 네, 손님 오셨어요? 네, 저-저녁 잡수시고 오세요? 네. 이 박사도 네시에 오셨다가, 저녁에 오신다고요? 그리고 또 저 심순례 아씨께서도 오셔서 기다리시는데, 네."

 

하고 유월은 수화기를 순례에게 주며,

 

"아씨, 전화 받으시라고요."

 

한다.

 

"아니 나 일 없다고. 어서 저녁 잡수시고 오시라고, 나는 나는 간다고."

 

하고 순례는 속으로,

 

"오, 정선이가 김갑진이하고 베이스볼 구경하고 어디 밥먹고 놀러가는구나. 남의 아내가 그래도 좋은가."

 

하고,

 

"나 간다."

 

하고는 대문으로 걸어나갔다.

 

이 박사가 저녁에 정선의 집에 온다는 말이 겁이 났다.

 

이 박사가 무엇하러 또 정선의 집에를 올까. 이제는 또 남의 유부녀를 호리기로 작정인가? 하고 순례는 일종의 분노를 깨달았다. 순례는 대문까지 갔다가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마침 유월이가 전화를 다 받고 순례를 전송하러 나오는 것을 만나,

 

"얘, 이 박사가 가끔 오니"?

 

하고 물었다. 순례는 이 말을 묻는 것이 천착스러운 것 같아서 스스로 부끄러웠다. 낯이 후끈함을 깨달았다.

 

"요새 가끔 오세요. 오셨다가도 잿골 서방님이 오시면 곧 가시겠죠."

 

하고 자기가 영리해서 모든 관계를 다 아는 것을 자랑하는 듯이,

 

"잿골 서방님이 이 박사를 여간 놀려먹어야죠. 그건 차마 못 들을 말씀을 다 하시죠."

 

하고 재잘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