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영은 이렇게 생각하였다.
"그러나 순례의 집에는 돈이 없다는데, 순례에게 장가를 들기로니 무엇으로 양옥을 짓고 피아노를 사나. 그것도 없는 살림도 살림인가. 이것이 나의 일생의 이상이 아닌가.
그렇고말고. 순례와 혼인을 해버리면 어느 부잣집에서 나를 사위를 삼으려 하더라도 못 삼을 것이 아닌가. 그리 되면, 나는 영영 일생의 이상을 버리는 것이 아닌가.
그나 그뿐인가. 이제는 나는 직업도 잃어버리고 무엇으로 생활을 하나. 다시 한 선생한테 가서 과거의 잘못을 회개하고 직업을 주선해달랄까. 순례와 혼인을 하고 한 선생께 회개를 하면 어디 취직이 될 듯도 싶지마는 비록 본래 소원인 여자 전문학교의 선생은 못된다 하더라도 남자 학교라도…그것이 빠른 길이 아닐까. 이 꼴을 하고 돌아다니면 장차는 무엇이 될 것인고."
하고 건영은 어디를 어떻게 걷는지도 모르고 망연히 발을 옮겼다. 눈을 들어보니 순례는 어디로 스러지고 말았다.
"순례의 맘이나 돌리기야."
하고 쉽게 생각하니 맘이 약간 만족하였다.
"정선이나 찾아가보고."
하고 이 박사는 발을 돌려 다시 정선의 집으로 향하였다.
"순례가 나오는 것을 보니 정선이가 집에 있는 듯도 하다. 갑진이만 아니 와 있으면 정선의 아름다운 모양을 실컷 즐기기로니 순례와 혼인하는 데 무슨 방해가 되랴. 내일은 순례 집에를 가기로 하고 오늘 밤에는 정선의 집에서 놀자. 만일 정선이가 있고 갑진이만 없으면 공회당 무용 구경을 데리고 가보자."
이러한 분홍빛 생각을 하며 정선의 집 골목으로 걸어들어갔다. 이 박사는 정선을 곁에 놓고 벌거벗은 젊은 여자들이 춤을 추는 양을 그려볼 때에 순례에게 받은 모욕도 다 잊어버렸다. 오직 유쾌하기만 하였다.
"이리 오너라."
하고 이 박사는 정선의 집 대문에 섰다. 전등불빛에, "許崇"이라고 하얀 나무패에 써붙인 문패가 보였다. 그 문패는 아직 때도 묻지 아니하였건마는 이 부부는 벌써 낡아빠져서 틈이 났구나 하였다. 그러나 자기는 계집애들의 입술을 따라서 이 꼴을 하고 돌아다닐 때에는 허숭이가 돈 있는 어여쁜 아내도 다 내던지고 농촌에 들어가 농민들과 함께 고락을 같이하고 있는 것을 생각하면 그의 히로익한 것이 더욱 숭고해 보이는 대신에 자기의 생활이 너무도 무가치함을 느끼지 아니할 수 없었다.
이 박사는 역사를 배우고 사회학을 배우고 윤리학까지 배우고 성경까지도 배웠다. 무엇이 사람의 일로서 숭고한 것인지를 스스로 분별할 지식의 힘이 있을 뿐더러 청춘 남녀로 하여금 그것을 깨닫게 할 만한 능력을 얻기 위하여 논리학과 수사학과 웅변학과 심리학까지도 배웠고 또 문학도 배웠다. 그렇지마는 그의 타고난 이기적이요, 향락적인 천성은 이 모든 공부 때문에 그리 큰 영향을 받지 못하였다.
그는 이 모든 값비싼 지식과 수양과 능력을 오직 돈 있는 미인을 후리기에만 이용하였다. 다만 조선이 그에게 돈 있는 미인을 아내로 주기만 하면, 그 다음에는 이 능력을 그가 노상 말하는 바와 같이 조선과 조선 민족을 위하여 쓸는지도 모를 것이다. 그렇다 하면, 진실로 그렇다 하면 조선의 미인 딸 둔 부자는 다 조선의 죄인이다. 이 박사로 하여금 위대한 민족적 사업을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그들이니까. 은경을 이 박사에게 주지 아니한 한은 선생도 죄인이다.
"누구세요"?
하고 문을 여는 것은 유월이다.
"시골서 올라오셨니"?
하고 이 박사는 허숭을 찾아온 모양을 보이려 하였다.
"영감마님입시요? 안 올라오셨습니다."
하고 유월이는 터지려는 웃음을 참았다. 그것은 이 박사가 올 때마다 그렇게 묻는 까닭도 있거니와, 네시에 다녀가고 아직 경의선 차시간도 아니되었는데 어떻게 그동안에 허숭이가 올라올 수가 있으리라고, 빤히 속이 보이는 소리를 하는 것이 우스웠던 것이다.
"거, 원, 어째 안 올까. 아씨는 계시냐"?
하고 이 박사는 있다는 대답을 기다렸다.
"아씨…우리 댁 마님입시요"?
하고 유월이는 이 박사의 말을 교정한다. 영감의 부인이 아씨실 리가 있나, 유월이는 괘씸스럽게 생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