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진의 편지를 불살라 버린 숭은 대단히 유쾌한 생각으로 저녁을 먹었다. 그리고 이발소에 가서 머리를 깎고 목욕을 하고 돌아와서 마치 몸과 마음의 때를 씻어 버린 듯이 기쁜 마음으로 자리에 누웠다. 마음 한편 구석에 뭉키어 있는 무엇을 숭은 아무쪼록 못 본 체하려 하였다. 숭은 여러 날의 노심과 피곤으로 잠이 들려 할 때에,

 

"전보 받으우."

 

하고 대문 두드리는 소리에 깨었다.

 

"명조 일곱 시 착경"

 

이라는 것이다.

 

정선이가 며칠 숭을 기다리다가 하릴없이 올라오는 것이었다.

 

이튿날 숭이가 잠을 깬 것은 다섯 시였다. 잠이 깨매 어제, 갑진의 편지를 불사를 때에 맛 보던 유쾌하던 생각은 훨씬 줄어 버렸다. 마치 목욕탕에서 깨끗이 씻은 몸에 밤새에 무슨 분비물이 생겨서 몸이 끈끈한 모양으로 마음에도, 영혼에도 무슨 분비물이 생겨서 텁텁해진 것만 같았다.

 

숭은 세수를 하고 뒤꼍에 나아가 운동을 함으로 이 흐릿한 기분을 고치려고 애를 썼다.

 

숭은 무엇에 내리 눌리는 듯한 몸과 마음을 억지로 채찍질해서 정거장에를 걸어나갔다.

 

"무한한 사랑, 무한한 용서, 무한한 의무, 무한한 사랑, 무한한 용서, 무한한 의무, 섬김, 나를 죽임, 섬김, 나를 죽임…무한한 사랑, 무한한 의무"

 

이렇게 숭은 걸음걸음 중얼거려서 마음을 덮으려는 질투의 구름, 미움의 안개를 쓸어 버리려 하였다.

 

아직 전기불이 반짝반짝하였다. 텅 비인 전차들이 잉잉잉 소리를 내며, 빛나지 않는 머릿불을 내어두르며 달아났다. 까무스름한 안개가 희미하게 집과 길을 쌌다. 이러한 속으로 숭은 무거운 마음을 안고 아내를 맞으러 페이브먼트를 타박타박 울리면서 남대문을 향하였다. 입술은 마르고 혓바닥에는 바늘이 돋았다.

 

남대문에서부터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것은 다만 남대문 시장으로 들어가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일본으로부터 만주로 싸우러 가는 군대가 통과하는 것을 송영하러 가는 학생 행렬과 단체들도 있었다.

 

정거장은 발 들여놓을 틈 없이 승객과 군대 송영객으로 차 있었다.

 

숭이가 정선을 기다리는 제일 플랫폼에서도 군대를 송영하는 제이 플랫폼 광경이 잘 건너다보였다. 정선이가 탄 열차가 경성역에 들어오기를 기다려서 북으로 향할 군대 열차는 정선의 열차보다 십분 가량 먼저 정거장에 들어왔다.

 

열차가 정거장에 들어올 때에 송영 나온 군중은 깃발을 두르며 "만세"를 부르고, 중국 사람의 것과 비슷한 털모자를 쓴 장졸들은 차창으로 머리를 내어밀고 화답하였다. 송영하는 군중이나 송영받는 장졸이나 다 피가 끓는 듯하였다.

 

이 긴장한 애국심의 극적 광경에 숭은 남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고향과 사랑하는 사람들을 두고 나라를 위하여 죽음의 싸움터로 가는 젊은이들, 그들을 맞고 보내며 열광하는 이들, 거기는 평시에 보지 못할 애국, 희생, 용감, 통쾌, 눈물겨움이 있었다. 감격이 있었다. 숭은 모든 조선사람에게 이러한 감격의 기회를 주고 싶다고 생각하였다. 전장에 싸우러 나가는 이러한 용장한 기회를 못 가진 제 신세가 지극히 힘 없고 영광 없는 것 같이도 생각했다.

 

이러한 일생에 첫 기회가 되는 용장하고 감격에 찬 생활의 생각을 하고 섰을 때에 정선을 담은 차는 콧김을 불며 굴러 들어왔다.

 

차창에서 서서 내다보는 정선의 적막한 얼굴이 번뜻 보였다.

 

정선은 플랫폼에 섰는 남편을 보고 곧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다. 그것은 아내가 남편에게 대한 본능이라고 할 만한 것이었다. 그러나 소리를 지른대야 겹유리창을 통하여 밖에 들려질 리도 없겠지마는 겹유리창보다도 더 두꺼운 무엇이, 정선의 마음의 부르짖음이 숭의 귀에 들어가지 아니할 것같이 생각됐다. 더구나 남편은 제게 무슨 비밀이 그 동안에 있는지도 모르고 여전한 아내인 줄 알고 반갑게 마중나온 것이라고 생각할 때에 몹시 마음이 아팠다.

 

숭은 아내의 얼굴을 찾고 곧 차에 올라갔다.

 

"침대 안 타고 왔소"?

 

하고 숭은 반가운 음성으로 물었다.

 

"안 탔어요."

 

하고 정선은 잠깐 남편의 낯을 바라보고는 가방을 찾는 체하고 고개를 숙여서 외면을 하였다. 낯이 후끈거리고 가슴이 울렁거림을 깨달았다.

 

숭은 정선의 짐을 두 손에 들고 앞서서 내려왔다.

 

"만세" 하는 여러 천 명 사람의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정선은 남편의 뒤를 따라 나가는 데로 향하였다. 남편의 다리의 움직임, 구두의 움직임을 보는 눈도 가끔 아뜩아뜩하였다.

 

"남편이 내 비밀을 알고 저렇게 태연한가, 모르고 저렇게 태연한가"

 

하고, 정선은 마치 경관에게 끌려가는 죄인과 같은 생각으로 어디를 어떻게 가는지 모르게 위켓을 나섰다. 거기서 기다리고 섰던 유월이가 내달아 정선을 맞았다.

 

"무엇 자셨소"?

 

하고, 숭은 짐을 놓고 정선을 돌아보며 물었다.

 

정선은 애원하는 눈으로 남편을 바라보며 말없이 고개를 흔들었다.

 

숭은 택시를 불러 짐을 싣고 유월이더러 먼저 집으로 들어가라고 이르고,

 

"가서 차나 한잔 먹고 갑시다. 추워."

 

하고 앞섰다. 정선은 말없이 뒤를 따라섰다.

 

"살여울 아무 일도 없었소"?

 

하고 숭은 아내의 외투를 벗겨서 걸면서 물었다.

 

"별일 없어요."

 

하고 정선은 자리에 앉는다.

 

숭도 자리에 앉아서 아내를 바라보았다. 정거장 앞에서 갑진과 함께 자동차를 타고 갑진의 팔이 정선의 어깨 뒤로 돌아와 놓였던 그때 광경이 숭의 눈 앞에 번쩍 보인다. 숭의 입에는 쓴 침이 돌았다.

 

"조오쇼꾸(아침밥이라는 일본 말)!"

 

하여 보이에게 시키고, 숭은 일어나려는 마음의 물결을 억지로 진정하면서 무슨 말을 할 것인가를 찾았다.

 

"이번 가 보니까 살여울이 맘에 듭디까"?

 

하고 숭은 억지로 웃어 보였다.

 

"……"

 

정선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끄덕하였다. 목이 메어 말이 나오지를 아니하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