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은 이러한 정선의 말을 들을 때마다 어떤 때에는 제가 아내의 뜻대로 활활 해줄 힘이 없는 것이 괴롭기도 하였다. 어떤 때에는 이때 조선 형편에 나 한 몸의 안락만 생각하는 아내의 맘보가 밉기도 하였다.
그러나 정선의 생각은 어떻게 하면 하루바삐 마음에 드는 양옥이 실현될까, 마음에 드는 세간이 장만되고 한번 모든 것이 다 마음에 들게 해 놓고 살아볼까 하는데만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남편 되는 숭이 정선의 이 뜻, 이 간절한 뜻, 이 마땅한 뜻을 알아주지 못하는 것이 기가 막힐 일이었다.
남편이란 것은 아내의 이러한 정당한 생각을 알아 차려서 속히 실현해 줄 능력과 성의를 가지는 것이 정선의 부부관이었다. 남편이란 무엇에 쓰는 것이냐. 그것은 아내를 기쁘게 하기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냐. 남편으로서 아내를 기쁘게 하는 능력을 잃는다 하면 그것은 정선이 보기에는, 짠 맛을 잃은 소금이 아니냐. 짠 맛을 잃은 소금 같은 남편은 정선에게는 이상적 남편이 될 수는 없었다.
게다가 남편으로서 아내를 기쁘게 하는 기술이 숭에게는 없었다. 정선은 먼저 혼인한 동무들에게서 지나가는 이야기로, 내외 생활, 일반 남녀 생활의 깊은 재미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으나, 숭에게서는 그러한 것을 얻어볼 수가 없었다. 숭은 너무 점잖았다. 너무 아내인 저를 존경하였다. 너무 엄숙하였다. 정선은 기교적인 것이 소원이었으나 숭에게는 그런 것을 바랄 수가 없었다.
숭은 아내의 이 요구를 노상 모르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숭은 인격의 존엄으로 보아서 아내의 그 요구에 응할 수는 없었다. 숭은 아내의 도덕적 수준을 제가 가지고 있는 곳까지 끌어 올리려고 해보았다. 그래서 한 선생을 집으로 청하기도 하고 또 성경 기타 정선이가 체면상으로라도 홀대할 수 없는 책에 있는 말도 인용하여,
1. 섬김
2. 구실
3. 맡은 일
4. 금욕
5. 우리를 위한 나의 희생
6. 구실과 맡은 일을 위한 나 한 사람, 또는 내 한 집의 향락의 희생
7. 주 되는 일은 민족의 일, 개인이나 나 가정의 일은 남은 틈에 할, 둘째로 가는 일
8. 평등, 무저항
이러한 제목으로 많이 토론도 해보았다.
정선은 이러한 말을 잘 알아들었다. 그 말에 해당한 영어까지도 잘 알았다. 그래서 숭이가 조선말로 말하는 데는 곧 그것을 영문으로 번역을 하고는 <오케이> <오라잇> <굿> <언더스탠드> 하고 어리광삼아 장난삼아 농쳐버리는 것이 예사였다.
그러면 숭도 하릴없이 웃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혼자 해석하는, 물론 정선이도 이러한 생각을 잘 안다. 잘 알 뿐더러 그러한 주의를 가지고 있다. 정선과 같이 영리하고, 고등교육을 받고, 또 얌전한 사람이 아니 그럴 리가 없다. 그는 조선이 요구하는 새로운 딸의 하나일 것이다-그렇지 아니해서는 아니 된다.
이렇게 생각하고 혼자 위로하였다. 그리고 장난꾼 모양으로 제 앞에서 응석을 부리는 정선을 정답게 생각하였던 것이었다. -이런 생각을 하며 숭은 자리옷을 입은 채로 자리 위에 일어나 앉아서 안방을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불현듯 정선이가 그리웠다. 그의 생긋생긋 웃는 모양이, 또는 시무룩한 모양이 또는 자다가 깨어서 눈도 잘 아니 떨어지던 모양이, 그의 발끈하던 모양이, 남편이 아니고는 가질 수 없는 정선에게 관한 여러 가지 포즈와 태도의 기억이 벽에, 장에, 눈을 돌리는 대로, 눈을 감으면 눈속에 어른거렸다. 정선의 입김이 숭의 뺨에 닿는 것도 같고, 팔이 목덜미에 스치는 것도 같았다. 정선의 향기가 코에 맡겨지는 것도 같았다.
숭은
"정선이란 내게서 뗄 수 없는 존재다. 정선은 내 조직속에 스며든 존재다"
하고 숭은 빗질 아니해서 헝클어진 머리를 흔들었다.
숭의 가슴속에는 정선에게 대한 그리운 생각이 못 견딜 압력으로 복받쳐 오름을 깨달았다. 숭의 의지력으로 거기 반항하여 내려누르려 하였으나 되지 아니하였다.
"맘 변한 계집을"
하고 일부러 정선에게 대한 반감을 일으키려 하였으나 그러한 때에는 뉘우침의 눈물에 젖은 가련한 정선의 모양이 눈 앞에 떠올라 더우기 숭의 마음에 동정하는 생각이 넘치게 한다.